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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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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2,408회 작성일 13-09-2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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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주 밖으로 나온 노아와 그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은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9:1)고 하신 말씀처럼, 많은 자식들을 낳고 또 그 자식들이 다시 후손에 후손을 낳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마침내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보다 넓은 땅을 찾아 동쪽으로 이동다가 광활하게 펼쳐진 비옥한 평야 지대에 정착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이구동성으로 “성(城)과 탑을 쌓아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세기 11:4)라고 말하면서 큰 성읍을 건축함과 동시에 하늘에 닿을 만큼의 높은 탑을 쌓아나간다.
 
  이에 하나님은 또 다시 진노하시며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세기 11:6)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버릴 것을 결심하신다. 이윽고 하나님은 하늘에 닿을 탑을 쌓는 일에 여념이 없는 온 무리에게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온 지면으로 흩어버리시고 허망한 탑 쌓는 일을 그치게 하신다.
 
  이것이 이른바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이어서 창세기 11장에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는 ‘바벨탑’ 사건이다. 성경은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며, 어떤 ‘길’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까?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①를 만나 거기 거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城)과 탑을 쌓아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탑을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1~9)
 
  ① 고대 바벨론으로 알려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평야에 대한 구약 명칭.
 
  이 이야기를 ‘밖’으로 읽으면 우리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논란에 휩싸여버리고 만다. 첫째, 이 이야기는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아니면 허구일까? 둘째, 만약 사실이라면 이 어마어마한 탑을 누가 왜 만들었을까? 셋째, 이 세상의 수많은 종족과 언어가 단 한 장소에서 한 날 한 시에 생겨났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등등.
 
  그리고 ‘바벨탑’을 전적으로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인간의 교만의 궁극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강조하면서,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고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만을 믿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사건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언 18:12)라는 교훈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단지 이렇게만 읽으면 이 ‘바벨탑’ 사건은 지금 이 순간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글이 되어버리고 말거나, 단지 교훈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삶의 진정한 변화의 ‘길’을 오히려 가로막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다. 단지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거나 삶의 교훈 따위를 가르치고 일깨우는 책이 아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요한복음 18:37)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에서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맛보게 하고 누리게 해주는 참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이야기를 ‘밖’이 아니라 ‘안’ 곧 우리 마음으로 돌이켜 읽어보자. 그랬을 때, 이 ‘바벨탑’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특히 주목해 보고 싶은 구절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창세기 11:3)라는 말씀이다. 이는 온 무리가 한 마음으로 하늘에 닿기 위한 탑을 쌓기 시작하면서 한 말과 행동들이다. 성경은 이 말씀 속에 어떤 메시지를 담아두고 있는 것일까?
 
  벽돌은 진흙에 모래나 석회 따위를 넣고 이겨 틀에 박아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 낸 네모진 건축 재료이다. 즉 벽돌은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것’을 상징한다. 반면에 돌은 조금의 인공이나 인위가 가미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인 것’을 가리킨다. 또 역청은 나무 수지 또는 자연 아스팔트에서 취한 가연성 액체 탄화수소로서, 이 또한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방법’을 상징하는 반면에, 진흙은 어떤 인위도 가미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것’을 가리킨다. 견고하게 구운 벽돌과 인공의 접착제인 역청을 사용하여 하나씩 하나씩 정교하게 쌓아 올라가면 아주 높은 데에까지 이를 수 있지만, 돌과 진흙으로는 결코 높이 쌓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해서 하늘에 닿을 높은 탑을 쌓았다.”는 것을 영적으로 말해 보면, 우리는 언제나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자연스런’ 마음을 버리고 ‘인위적인’ 방법과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하나하나 견고하게 다지고 쌓아 나감으로써 하늘 곧 영원한 진리와 자유와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써 그들을 흩어버리시고 탑 쌓기를 그치게 했다.”는 것은, 진리에 이르는 ‘길’은 결코 그러한 인위적인 방법과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닿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하여 깊게 고민하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지만, 나는 스무 살을 갓 넘기면서부터 거의 15년 동안이나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인지? 나는 누구인지? 등등의 의문들을 붙들고 괴로워하며 그 완전한 해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면서 밖으로는 많은 책을 읽으며 성현들의 삶을 살폈고, 안으로는 늘 자신을 살피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어 겉과 속이 같은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게으르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며, 이기심을 극복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는 예수의 말씀을 늘 실천하며 사는 사랑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며, 가을날 내면의 충일 때문에 스스로의 가슴을 쪼개고야 마는 석류처럼 영혼이 충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자기완성’이라는 그 아름다운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절제하며 채찍질 하며 타는 목마름으로 거기에 매달렸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이루어낸 대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가슴 벅차 하기도 했다.
 
  그러나 때로 나의 그런 다짐과 결심이 약해지고, 변명과 합리화가 늘어나면서 어느새 타성에 젖어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해져 가는 나를 목격할 때면 나는 또 다시 미친 듯이 스스로를 다그치며, 인간이라는 이름에 값 닿는 존재가 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곤 했었다. 그 ‘떠남’은 나를 때로는 공사판의 막노동꾼으로, 때로는 대관령 목장의 목부(牧夫)로, 때로는 고등학교 윤리 교사로, 때로는 지리산 토굴의 수행자로, 때로는 수도원의 수사(修士)로, 또 때로는 빵공장 직공으로, 연근해를 오가는 선원생활의 갑판원으로, 신문사 교정부 계약사원으로 마구 몰고 가더니, 급기야는 깊은 산 속 자그마한 암자에서 목숨을 내건 50일 단식까지를 하게 했다.
 
  그렇게 나는 끝없이 끊임없이 내 ‘마음’이라는 벽돌을 견고히 구워 결심하고 다짐하고 실천하고 인내하고 수고하고 노력하고 확인함을 통하여 하나씩 하나씩 빈틈없이 쌓아 나감으로써 하늘 곧 영원한 자유와 진리와 ‘완전’에 닿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서 나는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세기 11:4)라고 한 그들의 말처럼, 마침내 내 안의 모든 부족과 결핍과 초라함을 완전히 극복해낸 대자유인이 되어 보란 듯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는 그들의 한량없는 인정과 칭찬과 부러움을 받고 싶었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며, 힘들고 보잘것없었던 나의 지난 삶들도 남김없이 보상받고 싶었다. 또 그런 존재가 됨으로써 언제나 흐트러지고 지리멸렬하기만 했던 삶에서 벗어나 매 순간 힘 있고 당당하게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창세기 11:8)라는 말씀과도 같이, ‘하늘’은 언제나 내게 닿을 듯 닿을 듯하기만 할 뿐 아무리 해도 온전히 닿지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구하는 자의 목마름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끝없는 좌절감은 50일 단식을 하면서 절정에 달해 마침내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기에 이른다.
 
  ‘아, 나는 안 되는구나……. 15년이 넘도록 내 마음은 오직 한 길만을 달려왔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건만,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결국 나는……안 될 인간인가……?’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다시는 옛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일생일대의 ‘비약’을 맞이하게 된다. 전혀 뜻밖에도 ‘하늘’에 닿으려고 애를 쓰던 바로 그 마음이 사라지면서 나는 이미 처음부터 완전하게 도달해 있는 나 자신을 갑자기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미 처음부터 ‘하늘’에 도달해 있었다! 내가 그토록 찾고 구하던 진리와 자유는 저기, “벽돌을 견고히 굽고 높이 쌓아서 도달할 수 있는” 먼 미래의 어느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언제나 떠나고 버리려고만 했던 있는 그대로의 나 곧 “돌과 진흙” 안에 온전히 들어 있었다. 나는 이미 처음부터 ‘방주’ 안에 있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적이 없었으며, 매일 매 순간 끊임없는 창조가 일어나는 나의 ‘내면의 천지’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들밖에 없었다. 아, 이 얼마나 놀랍고도 기가 막힌 일인가!
 
  그랬기에, 나의 방법과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하늘에 닿으려고 했던 일체의 몸짓은 이미 처음부터 불가능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마치 방주 안에 있으면서 방주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라는 말씀이 내게는 얼마나 가슴 저미게 다가오는지!② 그 너무도 분명하고 정확한 메시지에 얼마나 전율하게 되는지! 온갖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도 결국에는 우리의 영혼이 진실로 자유할 수 있는 ‘길’을 한결같이 보여주고 말해주고자 하는 성경의 그 섬세함과 따뜻함이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② 예수도 산상수훈(山上垂訓)을 통하여 ‘하늘’은 결코 무언가 수고하고 쌓아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써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태복음 6:26~30)
 
  이 ‘바벨탑’ 사건 이후부터는 『창세기』가 끝날 때까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마태복음 1:1)라는 말씀처럼, 예수의 계보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이삭과, 이삭의 아들 야곱과, 야곱의 아들 요셉을 중심으로 한 온갖 이야기와 다양한 사건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따로 ‘예수의 족보’를 통하여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하면서 그 영적 의미를 밝혀보기로 하겠다.
 
  이제,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십계명’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특히 그 첫 번째 계명인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의 참된 뜻을 나는 '종교 밖'에서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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