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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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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4,309회 작성일 13-07-1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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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성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 만물과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선포’하면서,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전체 66권 1,8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선포’와 함께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는지를 자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첫째 날에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고, 둘째 날에는 하나님이 하늘을 창조하셨으며,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와 땅 위의 모든 식물들을 창조하셨고, 넷째 날에는 하나님이 태양과 달과 별들을 만들어 땅에 비취게 하셨으며, 다섯째 날에는 하늘에 나는 새와 물 속의 모든 생물들을 창조하셨고, 여섯째 날에는 땅 위의 모든 짐승과 육축과 기는 것을 각기 그 종류대로 만드시고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으며, 이 모든 창조를 다 마치고 난 후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이야기가 창세기 2장3절까지 계속된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천지창조 이야기를 단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이야기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돌려 읽어보면 어떨까? 말하자면, 성경을 보는 관점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려서 ‘우리 마음의 이야기’로 한번 읽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단지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이스라엘의 역사(歷史)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과 우리 마음에 관한 경전이 된다. 성경의 중심이 우리 자신에게로 옮겨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돌려 읽게 되면, 창세기 1장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 속에서의 태초는 아득한 옛날의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되고, 천지는 우리 ‘내면의 천지’ 곧 우리 마음 안에서 매일 매일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온갖 다양한 모양의 감정, 느낌, 생각들이 된다. 단지 관점 하나를 ‘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리기만 하면 천지창조를 비롯한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아득히 먼 옛날의 역사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마음에 관한 말씀이 되는 것이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는 예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 곧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영혼의 목마름이 끝이 나고 영원한 자유와 진리와 행복이 충만한 ‘그 나라’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밖’이 아니라 ‘안’으로 눈을 돌려서 성경을 읽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문득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는 맑디맑은 거울이 되어, 그 앞에 오롯이 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던 우리 자신에 관한 새로운 진실들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우리의 온갖 다양한 경험과 지식과 노력이 가져다주지 못하던 참다운 지혜와 진리를 우리 안에서 발견하게 되어, 마침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성경은 온갖 비유와 이야기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 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가리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성경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읽는, 그래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태복음 11:12)는 말씀처럼,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가 우리 안에 있는 보배들을 마음껏 캐내어 가지는 새롭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그랬을 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이 천지창조 이야기는 어떻게 읽혀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晝夜)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세기 1:1~2:3)
 
  우리는 성경을 읽어 나감에 있어 ‘밖’이 아니라 ‘안’ 곧 우리 내면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와 성경을 읽으면 이 천지창조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되 6일 동안 매일 새로운 것들을 다양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로 따로 계셔서 천지와 만물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마음 안에서 매일 매 순간 새롭게 일어나는 온갖 다양한 모양의 감정, 느낌, 생각들의 창조를 가리킨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오늘’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고 다양한 감정, 느낌, 생각들의 창조가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그 가운데에는 밝은 마음도 있고 어두운 생각들도 있으며, 하늘처럼 맑고 따뜻한 마음도 있는 반면에 물처럼 차가운 감정들도 있다. 바다 속처럼 고요하고 안온할 때도 있지만 회오리바람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릴 것 같은 격랑의 순간도 경험한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눈을 떴을 때 살포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한 줄기에,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지만, 어떤 날에는 이유 없이 무겁고 우울한 마음에 일어나기조차 싫을 때가 있다. 길을 걷는 발걸음이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처럼 가볍고 경쾌할 때도 있고, 젖은 솜 마냥 한 걸음을 떼기조차 힘들 만큼 무거운 날도 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 넉넉한 마음일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엔 바늘 하나 꽂을 곳이 없을 만큼 날카롭고 메마른 마음이 되기도 한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편안하고 당당한 자신을 경험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주눅 들고 눈치 보며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목격하기도 한다. 또 개운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오늘’을 사는 날도 있지만,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어찌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채 겨우겨우 버티듯 하루를 보낼 때도 있다. 꿈도 꾸지 않고 죽은 듯 깊고 달콤하게 잠을 잘 때도 있고, 바람 부는 겨울밤 밤새 떠는 문풍지처럼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아 스산히 뒤척이는 날도 있다. 슬프다가도 기쁘고, 우울하다가도 밝아지고,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며, 미움과 질투와 분노에 범벅이 되어 괴로워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순간도 경험한다. 아, 얼마나 많고 다양한 창조들이 매일 매일 새롭게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은 마치 땅에 있는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들처럼(창세기 1:12),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무수한 별들처럼(창세기 1:16),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온갖 종류의 생물들과 날개 있는 모든 새들처럼(창세기 1:21), 그리고 땅에 있는 온갖 종류의 육축과 기는 것과 모든 짐승들처럼(창세기 1:25), 우리 ‘내면의 천지’에서는 매일 매일 얼마나 많고 다양한 감정, 느낌, 생각들이 창조되고 있는가.
 
  그런데 이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꼭 주목해 보고 싶은 구절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창세기 1장에서만 무려 일곱 번이나 거듭 나오는데,① 첫째 날에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고, 둘째 날에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며, 셋째 날에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다. 이렇게 6일 동안 창조하신 모든 것들에 대해 여섯 번이나 거듭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고서도, 그것도 모자라 창세기 1장 맨 마지막 31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해주고 싶어서 이렇게도 같은 말을 일곱 번이나 거듭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까?
 
  ①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 수’를 가리킨다. 곧 ‘완성된, 완전한, 온전한, 더 이상은 없는’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일곱 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모두가 좋은 것들밖에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 ‘내면의 천지’에서 매일 매 순간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온갖 종류의 감정, 느낌, 생각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즉 진리의 자리에서 보면 모두가 좋은 것들뿐이라는 진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② 다시 말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포로 시작되는 이 천지창조 이야기를 통하여 성경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다양한 모양의 창조들이 사실은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며,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은 진실로 다 좋은 것이기에, 우리의 생각과 분별을 따라 어떤 것은 택하고 어떤 것은 버리려고 하지 말고 다만 그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경험하며,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창세기 1:26) 인간의 참 모습이라는 것이다.
 
  ② 이것은 곧 ‘번뇌 그대로가 보리(菩提)’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성경은 일곱 번을 거듭 말하고 있건만,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분별을 따라 우리의 ‘내면의 천지’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둘로 나누어놓고는, 좋다고 여겨지는 것은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나쁘다고 생각된 것은 끊임없이 버리려고 함으로써 스스로 괴로움과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과 자비와 성실, 기쁨, 즐거움, 편안함, 자신감, 당당함, 지혜, 겸손 등은 좋은 것, 바람직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며 끊임없이 얻으려고 노력하고 또 그런 것들로써 우리 마음 안을 가득히 채우고 싶어 하는 반면에 미움, 분노, 게으름, 슬픔, 외로움, 무기력, 불안, 우울, 교만, 무지, 강박, 대인공포 등은 나쁜 것, 부끄러운 것,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며 어떻게든 버리려고 하고 또 그런 것들은 단 하나도 우리 마음 안에 남겨두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그런 쉼 없는 노력과 애씀의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자유와 행복을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 버리고 싶은 것들은 얼른 버려지지 않아서 괴롭고, 가지고 싶은 것들은 얼른 우리 마음 안에 온전히 들어와 주지 않아서 고통스러우니, 그 괴로움과 고통과 영혼의 목마름이 얼마이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이 천지창조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또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말씀처럼,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혼이 진실로 자유할 수 있는지 그 길을 분명하게 가리켜 보여주고 있다. 그 ‘길’은 바로 천지창조 이야기 속에서 일곱 번이나 되풀이되고 있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 속에 있다. 이 말씀이 거듭거듭 밝히고 있듯이,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그리고 꿈 속에서까지 ‘오늘’을 사는 동안 우리 ‘내면의 천지’에서 매일 매 순간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들은 진실로 다 좋은 것들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과 분별을 따라 어떤 것은 택하고 어떤 것은 버리려고 하는 모든 몸짓을 정지하라.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창조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진실로 다 좋은 것이니, 다만 그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우리가 속되다 하지 말라.③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지금이 아닌 미래의 어느 순간에 자유와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 자유는, 진정한 행복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꺾어 버리고 우리의 길을 돌이켜 여호와의 길 곧 ‘지금’으로 돌아오라.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계신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③ 이 말씀은 신약성경 사도행전 11장에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욥바성(城)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사도행전 11:5~10)
 
  우리는 지금 이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요한복음 18:37)라고 말씀하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태복음 23:9)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는 정녕 진리를 증거하셨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대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더하고 얼마만큼을 더 좋게 하려고 그렇게 자신 안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려고 몸부림치면서 스스로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는가. 이미 완전한 자가 다시 무슨 방법과 노력으로써 완전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그만 하라. 우리가 진리를 얻기 위해, 진실로 자유하고 행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무언가를 함으로써 완전해지려는 그 허망한 마음을 내려놓고,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완전한 자유의 길이요 해방의 길이며 사랑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우리가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지금' 속에 이미 온전히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일곱 번을 거듭 하고 있는 이 간곡한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이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여 단 한 순간만이라도 간택하는 마음을 버리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해 보라. 그러면 즉시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 안에 이루어져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시편 1:3) 마침내 우리 영혼의 모든 목마름과 메마름이 영원히 끝이 나고 강 같은 평화와 사랑이 가득히 흐르게 될 것이다. 성경은 1,800쪽에 이르는 그 방대한 이야기의 맨 첫 장에서부터 이토록 완전한 진리의 길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곤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오직 이 한 길만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얘기해 주고 있다.
 
  나는 그 길을, 성경이 분명하게 가리켜 보여주고 있고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 안에 온전히 드러나 있는 그 길을,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 완전한 진리와 자유의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펼쳐 보여주고 싶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자신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능을 회복하여 진정 자유롭고 행복하게, 항상적인 감사와 사랑이 넘실대는 삶을 살며 누리며 나누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사도행전 17:24~28)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그 길은 정녕 멀리 있지 않다.
 
  이제, 그 길을 보다 또렷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두 번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과(善惡果)’라는 이 기가 막히도록 아름답고 지혜 가득한 이야기 속으로……!④
 
  ④ 그렇게 선악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창세기 1장 27~28절의 말씀―“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에 대한 오해이다. 이 말씀 또한 ‘밖’이 아니라 ‘안’으로 읽어야 한다. 그랬을 때 ‘땅’은 곧 우리 마음이 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매 순간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마음을 진실로 정복하고 온전히 다스리게 되면 거기에서는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진 사랑이 나온다. 그 사랑으로 인류는 자연과 함께 행복하게 상생(相生)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 말씀을 ‘밖’으로 먼저 읽었기에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켜 그토록 가혹하게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데에만 몰두해 왔던 것이다. 그렇듯 성경의 모든 말씀은 먼저 '안'으로 읽어야 한다. '안'과 '밖'은 결국 하나이긴 하지만, '안'에서 먼저 밝아질 때 '밖' 또한 함께 그 진리의 빛 안에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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