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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信心銘) 강의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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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6,431회 작성일 06-02-07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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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信心銘) 강의 ― (2)
 
 
    간택(揀擇)의 경우, 게으름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구에서 저랑 같이 도덕경을 읽어나가는 젊은 모 교수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제일 못 견뎌 하시는 것이 바로 게으름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성실히, 게으르지 않게, 정녕 사는가 싶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싶은 마음에 늘 입술이 타듯 하셨는데, 그러다 보니 밤에 불을 못 끄고 주무신답니다. 왜냐하면 책을 든 채로 잠이 들어야 그것이 그래도 하루의 마지막 순간까지 뭔가를 열심히 하다가 잠이 든다는 자기위로와 확인이 되니까요.
    그렇듯 그분은 잠시도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언제나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것이 진정으로 인생을 열심히 사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마음만큼 삶이 그렇게 되는가요? 게으르지 않으려고 참 많은 애를 쓰는데도, 마음만 그럴 뿐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함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이젠 그런 자신에 대한 정죄와 환멸까지 덧보태어져서 삶이 참 힘들어져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다시는 게으르지 않고, 그 게으름으로 인한 쓰라린 자기분열감 없이 재밌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아, 나의 제일 큰 문제가 바로 그것인데,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게을러 보세요. 그러면 됩니다. 교수님은 스스로를 게으르다, 게으르다 하시는데, 제가 보기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게을러 본 적이 없어요. 게으름이 찾아오면 언제나 그것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정죄하면서 끊임없이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만 했지, 한 번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게을러 본 적이 없잖아요? 그리고 또 사실 게으르지 않으려고 애쓴 만큼 제대로 성실해 본 적도 있나요? 없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도달하기 힘든 '성실' 쪽으로 나아가려 하지 말고,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게을러 보세요. 'BJR(배째라)' 하는 거지요! 교수님 안에서 뭔가를 진실로 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려 보라는 말입니다. 게으름이 오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교수님이 먼저 나서서 그 게으름을 조절하고 통제하여 '성실'로 바꾸려 하지 말고, 정말 교수님 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솟구칠 때까지 그 게으름을 그냥 내어버려 두라는 말이지요. 인생은 제대로 무너졌을 때 진정으로 제대로 섭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다시는 교수님의 삶 속에서 영원히 게으름을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것, 현재의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충실해 보라는 것이지요. 간택(揀擇)하지 않는 겁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본능적이고도 맹목적으로 게을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게으름을 비롯한 (가)쪽의 것들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버려야 할 '번뇌(煩惱)'하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사실은 바로 그 번뇌가 곧 '보리(菩提)'예요! 게으름이 곧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모르니, 그토록 집요하게 게으름을 버리고 성실하려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치 진리를 버리고 진리를 구하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입니다. 다만 간택(揀擇)하지만 않으면,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입니다.

    어쨌든 그 교수님은 제 말을 가만히 듣더니, 살포시 웃으시면서 "그렇게는 나는 못할 것 같아요."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실하려는 최소한의 마음마저 내던져 버릴 수 있느냐는 거예요. 마음만큼 실제로 삶이 성실해지진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런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냐구요.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말씀은 그렇게 하셨으면서도 집에 돌아가서는 실제로 그렇게 한 번 해봤답니다.
    마침 그 주에 나흘간의 휴가를 받았는데,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감당할 길이 없을 것 같아 어디 멀리 여행을 떠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떠나려고 한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억수같은 비가 내려서 못 가게 되었는데, 그때 문득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게을러 보라'는 말이 생각나더랍니다. 그래서 '좋다, 한 번 해보자.' 하고 마음먹은 거지요. 그리곤 정말 그 나흘동안 아무것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자신의 인생에서 정말이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그 생각을 마음에서부터 놓아버리기는 그게 처음이었대요.
    처음 이틀동안은 답답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답니다. 그러다가 사흘째가 되니까 불안해지기 시작하는데, 온갖 생각이 다 들고, 정말 이러다가 학교에서 해직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되고, 또한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다 망가지는구나 싶은 게 두렵기도 하고……. 늘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서 살아왔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순간 그런 생각들이 드는 건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BJR!('배째라'의 약자입니다 - 웃음) 했답니다. 그냥 내버려둔 거지요.
    그래요, 그냥 가만히 내어버려 두면, 렛 잇 비(Let it be, 그냥 일어나는 대로 두라) 하면 돼요. 간택(揀擇)하지 않는 거지요. 그러면 전혀 다른 에너지가 그 게으름 속에서 솟구쳐 나와요. 그때가지만 기다리면 ― 무위(無爲) ― 돼요.

    노자 도덕경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회오리 바람은 아침나절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 누가 이러는가? 천지(天地)이다. 천지도 오히려 이렇게 오래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이랴?(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能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도덕경 23장)' 라구요.
    그래요, 간택하지 않고 조금만 기다리면 모든 것은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조금'을 못 기다려 우리의 인생이 이토록 힘들어져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또한 성경적으로 표현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좀 도와주려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려고 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냥 좀 가만히,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기다리면 될텐데, 그 사이를 못 참아 대뜸 나서서는 간택(揀擇)하고, 증애(憎愛)하고, 순역(順逆)하고, 취사(取捨)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안 줘요. 진리가 우리를 통하여 흐를 기회를 안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요? 그 많은 세월 애틋한 마음으로 자기완성을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하고 수행(修行)해 보지만, 내 삶 속에는 한 톨의 진정한 자유도, 평화도, 평안도 없는 거지요.

   그렇게 사흘을 "BJR!" 하며 견디던 그 교수님이 나흘째 되는 날 저녁무렵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발견을 하나 합니다. 뭐냐면, 나흘 동안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동안 후텁지근하게 더운 날씨도 자신을 너무 힘들게 했었는데, 그때 문득 수건 몇 장을 물에 적셔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머리나 손, 발 등에 덮으면 시원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래요. 이렇게 'BJR' 하면 지혜도 생깁니다(웃음). '생활의 발견'!!(웃음)
    그래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수건을 꺼내어 얼굴과 손, 팔 등에 문질렀더니 그토록 켜켜이 쌓였던 더위가 싹 가시면서 너무너무 시원하더래요. 그렇게 갑자기 시원해졌다는 느낌도 그렇고, 단순하지만 더위를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간단한 생활의 지혜를 발견했다는 사실도 괜스레 교수님의 마을을 들뜨게 해, 그때부터는 왠지 모르게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더랍니다. 그러더니 잠들 무렵엔 아예 내일 아침이 마구 기다려지더래요. 그동안 하기 싫어 미루고 미뤄놨던 일들을 빨리 가서 하고 싶어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한달 동안이나 미뤄놨던 일들을 일사천리로 해나가는데, 자신도 놀랐답니다. 예전엔 그렇게 하기 싫던 일들을 싫다, 좋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해나가는데,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다 마칠 때가지 피곤한 줄도, 힘든 줄도 몰랐답니다. 그리곤 콧노래를 부르며 학교를 나오는데, 얼마나 오랜만에 맛보는 존재의 상쾌함인지, 참 묘하고도 기뻤답니다.

    그 한 번의 경험이 이후의 교수님의 삶과 생활에 참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샘솟는 것이 너무나 좋고, 예전엔 사람들과의 관계가 언제나 힘들었는데 어느새 그 모든 사람들을 참 편히 대하고 있는 자신이 때론 대견스러워지기까지 하며, 언제나 재미없고 힘겹기만 하던 하루 하루의 일상(日常)이 재미없을 사이도 없이 그저 바쁘고 가볍게 지나가는 게, 요즘은 거의 '살 맛'마저 난답니다.

    그래요,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 아시죠? 한 마리 기어다니는 애벌레가 창공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눈부시게 그린 이야기인데,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애벌레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기어다니거나 먹는 일 뿐인, 털이 부숭부숭 나고 볼품없고 느릿느릿하기만 한 그 애벌레의 몸뚱어리 속에서 창공을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나비가 나온다는 기적같은 이야기 말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봐도 보잘 것 없고 볼품없고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을 것 같은 '게으름' 속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와요. 모두가 같은 얘기거든요? 애벌레 안에서 나비가 나왔듯이, 게으름 그것이 바로 보리(菩提)요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만 간택하지만 않으면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입니다.

    외로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구 도덕경 모임에서 강의 중에 만난 그분같은 경우도 그저 외롭지 않으려고만 했지, 한 번도 진실로 외로워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당신은 외로움이 뭔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외로움이 오면 언제나 그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면서 끝없이 피하려고만 했지, 한 번도 그것을 맞닥뜨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떠돌고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라, 그 속에서 살아 보라, 그러면 다시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자족(自足)이란 바로 그 외로움 속에 있다, 단 한 번의 맞닥뜨림 그것이 모든 문제의 뿌리를 영원히 끊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미 내게 와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 그것이 게으름이면 게으름인 대로, 외로움이면 외로움인 대로, 불안이면 불안인 대로, 부족이면 부족인 대로 단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보세요.
    진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어떤 노력이나 수행(修行)을 통해서 다가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예요. 만약 그것이 애쓰고 노력하여 갈 수 있는 자리라면 과연 몇 사람이나 그 진리의 자리에 닿겠어요? 진리는 그런 게 아니예요. 진정한 행복을 위해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는 그 마음만 쉬면 되요. 진실로 진실로 그럴 수만 있다면, 진실로 그렇게 그칠[止] 수만 있다면―!

    이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지요. (가)쪽에서 (나)쪽으로 가려는 이 마음의 허구성(虛構性)을 성경을 통해 한 번 밝혀보겠습니다. 우리 눈에 바라보이는 것이 항상 우리를 참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감각이 항상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렇기는커녕 정반대로 우리를 그르치는 경우가 많아요. 
    성경에도 보면,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 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와 같이 우리 눈에 바라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볼 줄 아는 눈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그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라 뚜벅뚜벅 삶 속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지요. 
    논어(論語)에도 보면 '天理人欲之間每相反(천리인욕지간매상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이치와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 사이는 매번 서로 반대된다는 뜻인데,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참 가슴이 아팠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하늘의 이치 곧 진리(眞理)가 열리도록 되어 있으면 좋을텐데, 왜 하필 그게 반대방향이어서 우리를 그토록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할까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지요.
    우리는 끊임없이 (가)쪽을 버리고 (나)를 향해 가고자 하는데, 정작 하늘의 이치[天理]는 그 반대쪽 ― (가) ― 에 있다는 말입니다. 또 노자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正言若反(정언약반―도덕경78장)이라구요. 참 말은, 진실을 담은 말은 마치 반대인 것 같다는 뜻인데, 앞에서 말한 '天理人欲之間每相反'이라는 말과 똑같은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배어있는 말이잖아요? 이제 우리 마음의 이런 허구(虛構)를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善惡果)의 비유를 통해 한 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천지창조의 과정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라는 말이 참 자주 나와요. 그러다가 3장에 보면 뱀의 유혹이 나오는데, 그때부터 인간의 타락이 시작되어 요한계시록까지 줄곧 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 돌아오라 라는 말의 반복이예요. 참 아이러니잖아요? 그 두꺼운 66권의 성경책 가운데 단 두 장(章)만 '좋았더라, 좋았더라'이고 나머지 전체는 '돌아오라, 돌아오라'라는 것이요. 그러나 어쨌든 실제로 다시 돌아와 보면, 지금 여기예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첫 구절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때, 이 뱀은 우리 눈에 바라보이는 실제적인 뱀, 기어다니는 그 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내면의 뱀 곧 '생각'과 '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이 생각과 마음이 얼마나 간교합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이 뱀을 곧이 곧대로 읽어 애꿎은 뱀들 많이 죽었습니다(웃음). 뱀이 왜 간교합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안돼요.
    오래 전 얘기입니다만, 어느 절에 바람 쐬러 갔다가 우연히 그 절 주지스님과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아 이분이 얘기를 잘 하다가도 성경 이야기만 나오면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성경을 깎아내리는 거예요. "성경이 무슨 경(經)이냐, 성서(聖書) 곧 책이지. 경(經)이라고 할만한 것은 불경(佛經)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지창조'는 허구"라는 둥 막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창세기에 나오는 7일 동안의 천지창조 과정을 가만히 읽어보면,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우리 머릿속에 영상이 펼쳐지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쓰여져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머릿속에 그려지는 바 그대로 실제로 세상이 그렇게 창조되었다고 이해한다면 그 이해가 바른 이해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이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른다 라고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더니, 잠시 가만히 있던 주지스님이 "이 양반은 좀 깨어있는 기독교인이네!"라고 합디다(웃음). 성경이 너무 성경답게 읽혀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많아요. 더구나 지나치게 종교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되기를 강요받고 있구요.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하여튼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심(分別心)이 우리에게 들어온 그 소이(所以)를 성경에서는 선악과 비유를 통해 절묘하게 보여줍니다. 이때의 선악과라는 것은 바로 비교하고 분별(分別)하는 우리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여기 이 신심명에서 말하는 '간택(揀擇)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사실은 매일 선악과를 따먹고 있어요. 성경은 결코 창세기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우리 자신에 관한 얘기예요. 보세요, 하나님이 선악과를 에덴 동산 중앙에 심어놓고선……아니, 이 선악과 비유에 관한 성경 말씀을 죽 한 번 읽어보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세기 3:1∼11)

    보세요, 처음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6∼17) 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는 하와가 어떻게 대답하느냐 하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해요.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와에게서는 "죽을까 하노라"로 바뀌어 있지요? 참 미묘한 차이이지만, 그 틈을 비집고 뱀이 유혹해 들어옵니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요. 그렇듯 우리의 '생각'은 빈틈없이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우리를 집어삼켜 버립니다. 
    보세요, 뱀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구요. 햐! 그러니, 이 유혹에 안 넘어갈 자가 없는 거지요. 조금전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있을 때에는 하와는 선악과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뱀의 유혹을 받고는 문득 선악과를 봤더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따먹지요.
 
    우리 눈에도 앞에서 말한 (가)쪽 보다는 (나)쪽이 얼마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가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얼마나 (나)쪽으로 가기를 열망하는가요! 뱀도 하와를 유혹할 때 그랬어요, "너희가 그것 ― (나) ― 을 먹는 날에는……"이라구요! 그런데 그렇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 그 실과를 따먹었는데, 정작 따먹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정말 그들의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되었던가요? 노우(No)! 그렇기는커녕 정반대의 삶이 펼쳐집니다. 분명히 그 선악과를 따먹기만 하면 지혜롭게 되어 지금 보다는 훨씬 나은 존재가 될 것 같았는데, 정작 따먹고 난 뒤에는 전혀 엉뚱하게도, 벗었음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며, 무화과 나무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또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그런데 이 아담과 하와가 바로 지금의 우리 자신의 모습이예요. 보세요, 우리가 끊임없이 (나)를 동경하며 (나)와 같은 인간이 되려고 하는 동안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 (가)쪽에 있는 자신 ― 을 부끄러워하고, 그런 자신이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하며, 숨고, 또한 끊임없이 무언가로 자신을 가리고 하잖아요?
 
    무엇보다도, 하와의 눈이 하와를 바르게 인도했던가요? 그런 것처럼, (나)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도 할만큼 탐스럽게 보아 끊임없이 (가)를 버리고 (나)를 동경하는 우리의 맹목적인 믿음이 과연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까요?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 기가 막힌 성경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면,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자, 아담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는데, 그 말을 듣고 다시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절묘합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Who told you that you were naked)?"라고 되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네가 벗은 줄을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해야 될텐데, 성경에는 이상하게도 '누가'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이 '누가'가 뭐냐면, 바로 우리 '생각' ― 간택(揀擇)하는 마음 혹은 분별심(分別心) ― 이란 말입니다.
    이때 '벗었다'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가리키는데,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 ― (가) ― 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두려워하며 숨기게 하는 것은 바로 '생각'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한 '생각'만 내리면, 유혐간택(唯嫌揀擇) 하면, 그 자리가 곧 지도(至道)라는 겁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창세기 2장 마지막 절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2:25)라는 구절이 나와요. 벌거벗었다는 것, 곧 있는 그대로의 이 모습은 부끄러운 게 아니예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는 바로 그 마음이지요.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보세요. 우리는 지금 (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끊임없이 (나)쪽으로 가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벗은 채로 만드셨어요. 그리고 그 벌거벗은 우리를 하나님은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정말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요. 그 한 '생각' 때문에요. 그 허구(虛構)때문에요! 이 벌거벗은 나를, 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금여기의 나를 부끄럽게 여기는 한 진리는 결코 오지 않아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하늘인들 그를 사랑하겠습니까?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도 보면, 벌거벗은 이야기가 나와요.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포도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엔가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어버립니다. 그런데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 중에 가나안의 아비 함이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은 하체를 보고는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흉을 봅니다. 그 얘기를 들은 셈과 야벳은 얼른 자기네들의 옷을 취하여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는데, 이 대목에서 성경은 또 한 번 절묘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창세기 9:23)라구요. 잠에서 깬 노아는 벌거벗은 자기를 흉봤던 함에게는 저주를 내리고, 얼굴을 돌이켜 그 벗은 모습을 보지 않은 두 아들에게는 축복을 내립니다.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벌거벗었다'라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 벌거벗은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흉보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저주'라는 게 뭘까요? 끊임없는 자기분열감(自己分裂感), 한 톨의 진정한 평화도 없는 내면의 허허로움, 애틋하게 (나)쪽을 추구하지만 언제나 목격해야만 하는 것은 (가)쪽에서 아직도 몇 발짝 떼지 못하고 있는 자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쓰라림, 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성경이 다 그러한 얘기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성경에서의 예를 들자면, 모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시 '이집트 왕자'라는 만화영화를 보셨습니까? 안 보셨다면 한 번 보십시오. 아주 훌륭한 만화입니다(웃음). 그 영화에서 보면, 모세가 자신을 이집트의 왕자라고 여기고 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직 이집트의 영광과 피라밋의 웅장함, 그리고 그 속에 자랑스럽게 서있는 자신이었습니다. 바로 그 밑에서 채찍을 맞으며 신음하는 동족의 아픔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주 우연한 계기로 인해 자신은 이집트의 왕자가 아니라, 유대의 피가 흐르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묘한 것은, 그때부터는 똑같은 이집트의 거리와 왕궁에 서있어도 모세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오직 채찍 소리와 울부짖는 신음 소리 뿐입니다. 자신이 보는 세계가 달라진 것이지요. 그리곤 채찍질을 하는 이집트의 병사들에게 울분을 느껴 그 중 한 명을 죽여버립니다.
    모세는 이후 40년간을 방황하며, 마음이 낮아질대로 낮아집니다. 그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는 보잘 것 없는 촌로(村老)가 되어 양치는 일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모세 앞에 나타납니다. (이는 그 마음이 낮아질대로 낮아져 진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을 때, 진실로 그렇게 낮아졌을 때 진리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10)라구요. 예전의 모세 같았으면, 하나님이 나를 알아보는구나, 나 외에 누가 그 일을 감당하리오! 하고 으쓱하며 나섰을 터인데, 마음이 꺾일대로 꺾이고 낮아질대로 낮아진 그로서는 몇 번이나 거듭 사양을 합니다.
    그러는 중에 모세가 하나님에게 던지는 절묘한 질문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애굽기 3:13)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거지요. 그 말을 들은 하나님의 대답 또한 기가 막힙니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나다(I am who I am).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는 나다라고 말한 그이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3:14)

    여러분이 단 한 번만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다른 무엇과 비교하거나 간택(揀擇)하지 않고,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을 때, 그때는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곧 길(道)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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