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다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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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信心銘) 강의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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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16,816회 작성일 06-02-07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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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2003년 8월13일부터 9월3일까지 네 번에 걸쳐 매주 화요일 오후 7∼10시 서울 미내사 출판사 강의실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신심명(信心銘) 강의 ― (1)

 
    오늘부터 신심명(信心銘)이라는 교재를 가지고 앞으로 4주동안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신심명에 관한 소개를 잠깐 하자면, 삼조(三祖) 승찬(僧璨) 스님이 쓰신 시문(詩文)이라고 할까요, 전체 사언절구(四言絶句)로 된 146구 584자로 된 짧은 글입니다. 승찬 스님이 606년에 입적하셨으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의 사람이죠.
    그러나 그 글은 1400년이 흐른 지금에도 감탄할 만큼 놀랍습니다. 하긴, 노자는 2500년 전, 석가도 2500년 전, 예수는 2000년 전의 분들이고, 따라서 승찬스님 보다 훨씬 더 오랜 전에 계셨던 그분들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히 우리의 삶과 존재를 밝혀주는 등불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참 세월을 뛰어 넘어 변치 않는 무엇인데, 이 신심명도 마찬가지예요.
 
    승찬 스님을 혹자는 나병환자라 그러고 혹자는 중풍 든 사람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그 병으로 인해 죽을 고생을 하다가 이조(二祖) 혜가(慧可) 스님을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제가 괴로워 죽겠습니다.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생에서 이런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며 혜가 스님에게 자신의 죄를 좀 없애달라고 말합니다. 느닷없이 찾아와 불쑥 던진 승찬의 이 절박한 물음에 혜가 스님은 "그렇다면, 네 죄를 나에게 보여다오. 그러면 그것을 없애주지." 했더니, 승찬 스님이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다가 "찾을 수가 없어서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혜가 스님이 "그래? 그렇다면 그게 없어졌나 보군. 이젠 됐나?"라고 하시는데, 이 한 마디 말에 승찬 스님은 문득 깨칩니다.
 
    물론, 잘 아시다시피 원효대사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당나라로 가다가 해골 바가지에 든 물을 마신 계기로 문득 깨치게 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로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 승찬 스님도 자기의 병 때문에 괴로워 하다가 혜가 스님의 이 한 마디 말에 단번에 깨친 경우였습니다. 때가 무르익은 것이지요. 그리고는 혜가 스님으로부터 법을 이어 받으면서 승찬(僧璨)이라는 법명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은 늘 은둔생활만 했기 때문에 그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어쨌든 짧은 글입니다만, 이와 같은 명문(名文)을 남겨놓아 오늘날 우리에게 마음의 불을 밝히는 좋은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승찬 스님이 이 짧은 글을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던 게지요. 깨친 분이거든요? 삼조(三祖)라는 법통이 아무에게나 넘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수많은 책들 가운데 유독 '경(經)'이라는 글자가 붙은 게 있습니다. 금강경, 도덕경, 반야심경, 성경 등등. 그런데 이 '경(經)'자는 함부로 붙지 않아요. 말하자면, 법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죠. 달마(達磨)로부터 시작되어 이조(二祖) 혜가를 거쳐 삼조(三祖)의 법통을 이어받은 승찬 스님이 쓰실 글이에요. 뭔가가 있어요. 그분이 뭔가를 봤단 말입니다. 이름하여 도(道)라, 진리(眞理)라 할까, 하여튼 자신이 본 것, 자기가 안 것을 애틋한 마음으로 이 신심명 안에 담아둔 것이지요.
    성경 요한복음을 보면, '거듭남'에 대하여 니고데모가 물은 질문에 예수가 답을 하면서 한 말 중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한복음 3:11∼12) 라는 표현이 나와요. 그 표현이 참 재미있는 것은,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도 분명히 뭔가를 봤어요. 그리고 자신이 본 그 '뭔가'를 애틋하게 우리에게 들려주다가 간 거지요. 승찬 스님도 분명히 뭔가를 봤기 때문에 이 신심명을 썼고, 또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뭔가'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지요.

    그가 들려주는 얘기에 가만히 귀기울여 보면, 인생 전체의 본전(?)을 뽑습니다. 잘만 들으면, 그냥 신심명이라는 책 한 권 공부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 삶과 존재 전체가 뒤바뀌는 거예요. 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러한 것을 알았다는 단순한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존재 전체가 송두리째 뒤바뀌는 것입니다. 정말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쓴 라마나 마하리쉬는 늘 진아(眞我) 곧 '참나'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참나'에는 3가지 특성이 있대요. 실체(實體), 의식(意識), 지복(至福)이 그것인데, 특히 지복(至福)은 '참나'를 알게 되면 말 그대로 지극한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 말이 참 너무너무 부러웠어요.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자기분열감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참나'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하면 깨닫게 될 거야, 혹은 저렇게 하면 깨닫게 될 거야 라고들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보여지고 그럴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그 연장선상에서는 진리가 오지 않아요. 단지 그럴 거다 라는 생각이 끊어져야 오지요. 어느 날 문득 보면 뜻밖에 나는 언제나 진리 안에 있었음을 알게 돼요!
    그것처럼, 승찬 스님도 우리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참 복이 어디 있는지 우리에게 들려주는데, 잘만 들어보면 내 삶이 바뀌고 존재가 바뀌며 마침내 자유로워집니다.
    예전에 TV에서 캔커피 광고를 본 기억이 납니다. 배경음악이 깔리면서 한 사람이 행글라이더를 타고 날아가는데, 그러면 누군가가(특이한 제스처를 하며) "뭐가 보이는가?"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자유가 보인다!"라고 대답하지요. 그 말이 저는 너무 좋았어요. 자유가 보인다는 말이.

    우리가 단지 신심명을 가지고 문자공부만을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는 본전(?)을 생각해야 돼요(웃음). 그것은, 그저 구하거나 동경하는 자유가 아니라 누리는 자유, 내면의 모든 갈증이 끝나고 진정으로 평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의 문제를 푸는 것, 그것이 바로 '본전'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또한 진정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것인데, 저도 이 신심명을 강의하는 동안 그와 같은 실제적인 삶과 존재의 변화가 올 수 있도록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붓겠습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여러분의 내적 갈증이 해소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신심명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읽고 설명을 하는 동안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손을 들고 얘기를 해주세요.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간에 좋은 논의도 되고 또한 도움도 되지요.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 안연(顔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자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사람은 다 알아들어요. 항상 미소지으며 스승의 말씀에 기뻐하기만 했죠. 나중에 공부가 끝나고 나서 공자가 말하기를, "회(回) ― 안연의 이름 ― 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로다. 내가 말함에 기뻐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니……(子曰 回也 非助我者也 於吾言 無所不說)"라고 했습니다. 그가 질문을 해줘야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둘러앉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서로 교감이 이루어질텐데, 자기가 알아듣는다고 그저 미소만 짓고 있으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오붓이 질문도 잘하고 웃어가면서 편안히 진행하여 재미있는 공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장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한문을 먼저 읽겠습니다. 지도는 무난이니 유혐간택하라(至道無難이니 唯嫌揀擇하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만 버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여기 강의오면서 고속버스 안에서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도(至道)를 달리 해석해봤어요. '지도(至道)'를 '지극한 도'라 해도 좋지만, 지(至)자를 '이를 지'로 읽어 '도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읽으면 이 첫 구절은 '도에 이르는 길은, 곧 진리를 깨닫기란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만 버리라'라는 뜻도 되지요.
 
    사실이 그래요. 진리를 깨닫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 그래요, 진리는 그렇게 쉽고 가벼운 거예요. 아니, '쉽다'라는 말 자체가 필요없을 만큼 쉽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지요. 지도(至道), 즉 도에 이르는 길은 무난(無難)이니, 어렵지 않으니 유혐간택(唯嫌揀擇)하라, 단지 간택함만 버려라.

    다음 장을 읽겠습니다.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 즉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함만 없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이 통(洞)자가 '꿰뚫을 통'자입니다. 6번까지만 읽겠습니다. 호리유차(毫釐有差)하면,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잔털 호'자에 '이 리'자. 이 리자는 단위입니다. 10 ̄­­²정도 되는, 그만큼 작다는 것이죠. 호리라도 차이가 나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리라. '멀 현'자에 '뜰 격'자, 하늘과 땅 만큼 벌어진다는 말이죠.
    흔히 하는 말로 '사이비(似而非)'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슷할 사(似)'자에 '아닐 비(非)'인데, 말하자면, 언뜻 보면 비슷한데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사이비가 겉으로 보면 비슷하지만 사실은 진실과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어느 사이비라 해도 자기가 사이비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늘과 땅만큼 벌어지나니……
    욕득현전(欲得現前)이어든, 도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거든, 혹은 진리를 깨닫고 싶거든 말이지요, 막존순역(莫存順逆)하라, 순응함과 거스름을 두지 말라. 간택(揀擇), 증애(憎愛), 취사(取捨), 순역(順逆) 다 같은 말입니다. 도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거든 다만 따름과 거스름을 두지 말라는 말이지요.
    위순(違順), 즉 어긋남과 따름이 상쟁(相爭) 즉 서로 다투면(違順相爭), 시위심병(是爲心病)이니, 이게 바로 마음의 병이니, 불식현지(不識玄旨)하고,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이로다, 헛되이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는도다……. 자, 이제 설명을 자세히 드리겠습니다.

    임제 선사의 맥통을 이어받은 낭야 각(瑯야覺) 선사라는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에게 어느 재상(宰相)이 이 신심명에 대해 자세한 주해(註解)를 달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사가 맨앞의 1번과 2번 즉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이라는 글자는 커다랗게 쓰고 3번부터 73번까지는 작게 써서 주해로 붙여버렸습니다. 그렇게 쓴 것을 재상에게 보여줬더니, 재상이 왈, "아니, 주해를 달아달랬지, 누가 글자 놀음을 해달랬느냐?"고 못마땅해 했답니다. 그 재상이 몰라봤던 거죠. 사실은 그렇게 1번과 2번을 크게 쓰고, 3번부터 73번까지 작게 써서 주해로 붙인 것이 신심명에 대한 최고의 명 주해로서, 참으로 걸작이라는 평을 듣습니다. 더 이상의 다른 주해가 필요없었던 거죠.
    사실입니다. 1번과 2번을 진실로 알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인생 전체의 본전(?)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우린 항상 본전을 생각해야 돼요(웃음). 그래서 그 1번과 2번이 우리 삶 속으로 쑤욱 들어와 우리의 삶이 실제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얘기를 한번 해봅시다.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니, 오직 간택(揀擇)함만 버려라. 취사(取捨)죠. 간택하니까 취사가 되죠. 간택(揀擇), 증애(憎愛), 순역(順逆), 위순(違順), 사실은 이 모두가 다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단막증애(但莫憎愛:단지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하면 통연히 명백하리라……간택을 버린다는 것, 이것만 알면 지도는 무난입니다. 그렇다면, 뭘 간택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 말을 나와 내 바깥의 관계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바깥에서 주어지는 어떤 것들을 이것 저것 간택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또 단막증애(但莫憎愛)를 나와 남의 관계로 해석해서, 나와 인연되어 다가오는 사람을 너무 사랑하지도, 너무 미워하지도 말라는 식으로 이 글을 읽으면 오히려 아니 읽은 것만 못합니다. 오히려 짐이 되어버리지요.
 
    실제로 제가 대구 어떤 모임에서 매주 금강경 강의를 할 때 나중에 합류한 어떤 분이 계셨는데, 얼굴이 부처상처럼 참 좋았어요.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그 분은 내내 미소만 짓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질문도 하고 얘기도 하고 하는데, 그분은 언제나 아무런 말 없이 웃으면서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거예요. 언제나 한결같아 인생의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 환한 미소 뒤에 감추고 있는 삶의 무게와 문제가 많겠구나 라고 저는 생각했지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쯤 지나자 그분과 같은 직장을 다닌다는 어떤 분이 가만히 다가와 저에게, 저 사람을 좀 건드려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도 처음에는 그 사람이 얼굴도 좋고 참 푸근해 보여 친하게 지내고 싶어 다가갔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더라는 거지요. 자기 얘기는 하나도 안하고 남의 고민이나 얘기만 들어주면서 자신은 마치 무슨 해결사인 양 하더랍니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이더라는 것이지요. 자기는 다 닫아놓고 있으니,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 점점 더 부담이 되고 다가가기 힘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 어떻게 끄집어낼 수 없으니까 제가 그 마음을 한 번 건드려줬으면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가 왔어요. 강의를 하던 어느 날 그분이 무심결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말을 한 것이지요. 제 강의 중의 어떤 얘기가 자신에게 공감이 갔던지 한 마디 하는데, 뭐냐면, "선생님, 사람은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러면 나도 안 다치고 남도 다치지 않으니까요. 사실 너무 사랑해도, 너무 미워해도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이잖아요?" 그러면서 자기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는 거예요. 마치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원리를 자신은 발견했다는 듯이요.
 
    아아,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았는지는 모르나, 바로 그 때문에 그분은 그 오랜 세월 동안 그 누구와도 진정으로 교통(交通)한 적이 없고, 진정으로 가슴을 열고 만난 적이 없는, 홀로 외로운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리고 어느 누구와도 의식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그런 삶의 원리를 갖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어릴 때의 얘기를 해주시는데, 중학교 1학년 때의 어느 날 학교에서 자기는 별 생각 없이 어떤 친구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 친구가 다음 날 자기에게 다가오더니 정색을 하면서, 너는 왜 남한테 상처주는 말을 그렇게 하느냐,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아느냐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 순간 이 분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자기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한 그 얘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때부터 이 분은 마음 깊이 다짐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심해야겠다구요. 함부로 말하지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아야겠다구요. 아아, 이것은 그분에게는 너무나 깊은 상처가 되어버립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교통(交通)하지 않는 외로운 가슴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는 제가 말했습니다. "아아, 얼마나 외로웠을까!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려는 그 고운 마음이 정말이지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또 자신도 상처받지 않았는지는 모르나, 바로 그 때문에 그 오랜 세월 어느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다가가지도 않고 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애써 피하기만 해왔으니, 아아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오랜 세월 그 환한 미소 뒤로 외로움만 키워왔을 님의 아픔이 너무나 아려옵니다……."
    그랬더니,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종종 여러 사람을 울립니다(웃음). 그 모습을 보면서 또 말했습니다. "우세요. 얼마나 참았던 눈물입니까? 얼마나 울고 싶었던 눈물입니까? 우세요. 마음껏 우세요……." 그분의 눈물은 통곡으로 바뀌었고, 그날 강의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단막증애(但莫憎愛)라는 말이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이라고 풀이되기는 하지만, 이 분의 경우와 같이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오히려 사람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해요. 그런데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가까이 다가가야지요. 가까이, 더욱 가까이, 자신의 온 가슴을 열고…….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도 있고, 서로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거예요. 이게 우리네 삶이 아닌가요? 언제나 그래요.
 
    불교에서 '여여(如如)하다'라는 말을 곧잘 하는데, 이 말 또한 오해의 소지가 참 많은 말이예요. 일반적으로는,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고요하여 늘 한결같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그러나 그 고요가 격랑(激浪)이나 어떤 소란스러움과 분리된 것이라면 그것은 목석(木石)과 같은 것입니다. 진정한 여여함이란 격랑 그 자체가 되는 것이지요. 흔들림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여여함이지, 흔들림 자체가 없는 게 아니예요. 그렇게 보면, 우리네 삶 그 자체가 곧 여여함입니다.

    다시 유혐간택(唯嫌揀擇)이란 말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보면, '프로크루테스(Prokroustes)의 침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프로크루테스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Kephsos) 강가에 침대를 하나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침대보다 키가 크면 잘라 죽이고 작으면 늘여 죽이다가 그 자신도 결국 바로 그 침대에서 테세우스에 의해 잘려 죽는다는 얘기인데, 이게 뭐냐면, 바로 우리 자신에 관한 얘기이지요. 우리도 프로크루테스처럼 우리 내면에 침대를 하나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나그네, 곧 그때 그때의 우리 자신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과 말, 행동 등등을 이리저리 헤아려 보고 판단하고는, 어떤 것은 길다고 잘라내고 또 어떤 것은 짧다고 애써 늘이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잖아요?
 
    그와 같이 우리 안에는 참으로 모호한 기준과 잣대 ―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 가 하나 있어서 그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간택(揀擇)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그 침대에 딱 맞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쓰지요. 그런데, 신심명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바로 그 침대가 허구(虛構)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껏 우리는 나그네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늘 그 나그네 탓만 했는데, 아니예요, 사실은 그 침대가 허구입니다.

    어떤 수련에든 가게 되면 곧잘 무언가를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아집(我執)이랄까, 집착 혹은 욕망같은 것을요. 보십시오(물건을 하나 책상에 떨어뜨리며), 자, 손에 잡고 있던 것을 놓으면 이렇게 툭하고 떨어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생각하여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이 사실은 화장실에서 똥닦은 휴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게 똥닦은 휴지로 보이지 않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소중한 무엇으로 보이니, 어찌 내려놓을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 그것을 버리면 자신이 망가질 것 같고, 영 안될 것 같으니까 죽어라고 놓질 못하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눈에 소중해 보이는 것이 사실은 똥닦은 휴지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땐 뭐 놓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요. 그냥 툭-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사실은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와 같이 뭔가를 '정확히' 안다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가닿으려고 하는 내면의 '침대'가 사실은 똥닦은 휴지가 아닐까요?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간택함만 버려라.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이것은 나와 내 바깥의 관계가 아닙니다.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이 구절을 읽었을 때, 그때 비로소 살아있는 나와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늘 '간택하지 말라' 하면 바깥에서 주어지는 어떤 것에 대해서 간택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제 그만 바깥은 놔두고, 내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내 안으로 들어가서 이 구절을 읽으면, '간택하지 말라'는 말은 곧 내 안의 것들에 대해서 간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안은 언제나 둘로 나누어져 있는데, 우리는 언제나 그 중 하나를 간택하며 살아가지요. 우리가 어떤 것은 취[取]하고 어떤 것은 버리는[捨] 많은 것들 중에 '게으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자신이 궁극적으로 게으른 존재라는 것을 잘 몰라요. 그래서 게으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게으르지 않은 성실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또 얼마전에는 대구에서 도덕경 강의를 하는 중에 스스로 너무나 외로워하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오랜 세월 동안 진정한 자족(自足)을 찾아 그렇게 많이 떠돌아 다녔건만, 이제는 그 흐른 세월만큼이나 더 외로워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라며 울먹이는 모습을 봤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간택하지 말고 그냥 살면 될텐데, 그래서 게으름이 오면 그냥 게으르고, 외로움이 오면 그냥 외로우면 될텐데, 게으르지 않으려 하고 외롭지 않으려고 하다가 그 흐른 세월만큼 더 힘들고 더 외로운 자신을 발견할 뿐이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도(至道)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간택(揀擇)함만 버리면 됩니다.

      (가)        (나)
    게으름 → 성실함
    외로움 → 외롭지 않음
    불안 → 당당함
    무지 → 지혜
    미움 → 사랑
    분노 → 자비
    부족 → 완전함
    중생 → 부처[깨달음]
    죄인 → 의인
    지금여기 → 미래

    보세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안의 것들 가운데 좋은 쪽을 간택(揀擇)하며 살아갑니다. 게으름보다는 성실함을, 외로움보다는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하고, 불안보다는 당당함을, 무지보다는 지혜를, 미움보다는 사랑을, 분노보다는 자비를, 부족하고 못난 자기보다는 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요. 또한 중생(衆生)보다는 부처[깨달음]를, 죄인보다는 거듭난 의인을, 지금여기보다는 미래를 꿈꾸고 또한 그것을 구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와 같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삶의 모든 갈증과 불안이 해소되고 자유롭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하고 늘 꿈꾸는 것이지요. 그런 만큼 (가)는 버리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나의 모습입니다. 이 (가)의 나를 못 견디겠으니까 끊임없이 (나)쪽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정말이지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가)는 지금 현재의 나의 모습이고, (나)는 내가 바라는, 끊임없이 가닿고 싶어하는 미래의 나의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정으로 (나)의 사람이 되고 싶거든 (가)를 버리지 말라, (가)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하는 간택(揀擇)을 쉬어라, (가)쪽의 어떤 것이 오거든 프로크루테스처럼 대뜸 그것을 잘라버리거나 잡아늘이지 말고 그냥 그 속에 있어 보라, 다만 그와 같이 간택하지 말고 현재의 그 '부족' 속에 있어 보라, 그 '부족'을 믿어줘 보라, 그리하면 머지않아 곧 '지도(至道)'를 알게 되리니 ― 이것이 바로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의 뜻입니다.
 
    정말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것 속에 있지, 결코 미래의 완성된 무엇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는 없고 '저기'에는 있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맹목적인 믿음일 뿐 그것은 전적으로 허구(虛構)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가)쪽은 버리려고 하고 (나)쪽은 택하려고 하지요. 이 집요하고도 어리석은 간택(揀擇)의 마음을 어이하리오?

    노자(老子)도 말합니다, '불상현(不尙賢)'하라고. '상현(尙賢)'이라는 것은 (가)보다는 (나)가 더 낫다고 생각해 (나)를 높이고 (가)를 낮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현(賢)을 높이지 말라[不尙賢]는 것은 (나)를 높이지 말라, (나)를 구하지 말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가)]을 살라, 그냥 그렇게 다만 '현재'를 살라는 것입니다. 이 '至道無難, 唯嫌揀擇'이란 말과 똑같잖아요?
 
    예수도 그래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3:2)라구요. 이게 뭐냐면, '회개하라'라는 것이 교회에 가서 울고불고 하면서 늘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라는 것이 아니예요. '회개'란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가던 길'이 뭐예요? (가)를 버리고 끊임없이 (나)를 향해 가는 길이 아니었던가요? 그 길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거기 ― 곧 (가), 지금 여기! ― 있다는 것이지요. 모두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분들의 말을 믿지를 못해요. 믿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늘 우리 자신 속에서 목격하는 것은 (가)쪽인데, 그게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정하기란 참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다 잘나고 인정받으며 영예로운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들이 깊디 깊이 있는데, 그렇게 부족하고 못난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가)에서 자족(自足)하기가 그리 쉽겠어요?
    그러나 승찬(僧璨)도, 노자도, 예수도 말합니다, 진정으로 잘나고 영예롭고 은혜와 진리가 가득한 삶을 살고 싶거든 唯嫌揀擇하고, 不尙賢하며, 회개하라구요!

    사실 (나)쪽은 존재하지 않아요. 허구(虛構)이지요. 끊임없이 비교하고 분별(分別)하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라고 정의내리고 규정지은 자가 만들어놓은 허구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부족'을 못견뎌해요. 그래서 또한 본능적으로 현재의 자기 자신에게서 느끼는 부족과 결핍감이 대부분 극복된 무엇을 '완전'이라는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완전의 모습을 한 부족'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우리 눈에는 그저 완전하게만 보이니, 끊임없이 그 허구를 추구할 밖에요.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규정지은 사람은 결코 '완전'을 몰라요. '완전한 자'만이 '완전'을 알아요. 그렇지 않겠어요? '완전'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아무리 '완전'을 그려본들 그게 정작 완전한 것이겠어요? 그저 이러한 것이 '완전'이겠거니 하고 믿거나 상상할 뿐이지요. 어쨌든 그렇게 (나)쪽이 허구임을 알 때, 동시에 (가)도 부족하지 않음을 알게 돼요. 다만 존재할 뿐 사실은 '부족'이니 '완전'이니 라고 할 것도 없음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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