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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信心銘) 강의 ― (6 /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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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9,220회 작성일 06-02-0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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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信心銘) 강의 ― (6 / 완결)
 
 
    안녕하세요?
    어느새 신심명(信心銘) 마지막 강의시간이 다가왔네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유명한 말로 시작되는 삼조(三祖) 승찬(僧璨) 스님의 이 신심명을 함께 읽어볼 수 있어서 저도 참 좋았습니다.
    그래요, 도(道)에 이르기란, 진리에 이르기란 참 쉬워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미 이르러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도(道)에 이르려는 그 마음만 정지하면 그 자리가 바로 진리의 자리임을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지요.
    '깨달음'이란 게 따로 없거든요? '여기[此岸]'가 아니라 '저기[彼岸]',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는 그 마음 때문에 '여기'와 '현재'를 보지 못해서 그렇지, 그 마음만 정지하면 바라는 모든 것이 올올이 녹아있는 이 '현재'를 비로소 분명하고도 똑똑히 보게 돼요. 그러면 지금까지의 모든 갈애(渴愛)가 끝이 나고,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는 풍요로운 '현재'를 단지 감사해 하며 자족(自足)하며 살아가게 되지요. 그리고 이를 다만 이름하여 '깨달음'이니 '도(道)'니 라고 할 뿐이구요.
    중국의 유명한 재가승려(在家僧侶)인 부대사(傅大士)의 게송(偈頌)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夜夜抱佛眠
    朝朝還共起
    欲知佛去處
    語默動靜止

    밤이면 밤마다 부처[깨달음]를 껴안고 자고
    아침이면 아침마다 다시 함께 일어나나니,
    부처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싶거든
    어(語)·묵(默)·동(動)·정(靜)에 머물라.

    보세요, 얼마나 기가 막힌 말인가요? 밤이면 밤마다 부처[깨달음, 진리]를 껴안고 자고, 아침이면 아침마다 다시 함께 일어난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이대로가 부처요, 지금 이대로가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깨달아 있어요. 그런데 그 '부처'와 '깨달음'을 조금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마음이 언제나 '과거'나 '미래'로 달려갈 뿐 단 한 순간도 '현재'를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진정 부처[깨달음,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싶거든 어(語)·묵(默)·동(動)·정(靜)에 머물라는 말입니다. 어(語)·묵(默)·동(動)·정(靜)은 언제나 '현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잖아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미 어(語)·묵(默)·동(動)·정(靜)의 '현재'를 살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단지 우리의 마음[心]이 어(語)·묵(默)·동(動)·정(靜)의 '현재'에 머물러 있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그 '현재'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면서, '과거'로써 '현재'를 쥐어뜯으며 회한과 비탄에 잠기거나, '현재'를 부족하고 못난 무엇으로 정죄하고는 대뜸 수행(修行)이다 뭐다 하면서 깨달음 등의 '미래'의 보다 완전한 무엇을 찾아 길을 떠나버리지요.
    아아, 아니예요! 사실은 바로 그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러한 추구와 간택(揀擇)을 멈추고 우리의 마음이 단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현재'에 머물 수만 있다면, 다시 말해 "語默動靜止" 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 그러면 놀랍게도 단 한 순간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나와 내 안팎을 가득 채우게 돼요. 얼마나 멋져요? <추구>를 멈추기에 오히려 바라던 모든 것이 내 삶을 가득 채우게 되는 생(生)의 이 기가 막힌 반전(反轉)과 비약(飛躍)이요!
    그래요, 바로 이런 얘기들을 승찬(僧璨) 스님도 이 신심명을 통하여 애틋하게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계신 겁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서, 55번부터 읽겠습니다.

    55. 契心平等 所作俱息 (계심평등 소작구식)
         마음에 계합(契合)하여 평등해지면, 짓고 짓는 바가 다 쉬도다.

    마음에 계합(契合)하여 평등해지면, 다시 말해 추구와 간택(揀擇)의 마음이 사라지고 내 안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 말이지요, 짓고 짓는 바가 다 쉬도다, 즉 화날 땐 화내고 짜증날 땐 짜증내며 미워질 땐 미워하고 우울할 땐 우울하며[어(語)·묵(默)·동(動)·정(靜)] 그 모든 번뇌와 망상 속에서 뒹굴지만, 그 어느 것 하나에도 물들거나 매이지 않아[所作俱息] 언제나 '근본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 그런데 이 '평화'가 얼마나 큰지요! 삶 속에서 순간순간 확인되고 만져지며 새록새록 피어나는 이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놀랍고도 묘(妙)한지요!

    56. 狐疑淨盡 正信調直 (호의정진 정신조직)
         여우같은 의심이 깨끗이 다하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며

    우리의 마음 혹은 사고(思考)는 언제나 '가야할 곳'을 만들어요. 그래서 '여기[此岸]'보다는 '저기[彼岸]'를, '현재'보다는 '미래'를, '부족'보다는 '완전'을, '중생(衆生)'보다는 '부처[깨달음]'를 구하게 되지요. 말하자면,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항상 도달해야 할 인생의 <목표>쯤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답(答)'은 언제나 '문제' 속에 있어요.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 그 자체가 사실은 '답'이에요. 따라서 '문제' 속에 가만히 있어 보면, 조금만 더 그 '문제'를 '문제'로서 내어버려 둔 채 기다려주면, 그러면 오래지 않아 '문제' 스스로가 살포시 제 속살을 드러내며 사실은 그것이 '답(答)'이었음을 보여줘요.
    말하자면, '중생' 그것이 곧 '부처'요 '번뇌' 그것이 곧 '보리(菩提)'이며, 도달해야 할 '미래'의 <목표>가 사실은 '지금 여기' 라는 말이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 사실을 믿지 못한 채 우리의 사고(思考)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자신을 채근하며 황망히 길을 떠나버립니다.
    아아, 아니예요!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곳'은 없어요.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사고(思考)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이라고도 하지요 ― 가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예요.
    이러한 사실에 눈을 뜨면[狐疑淨盡], 생(生)의 모든 에너지가 오직 '현재'에만 있게 되어, 그냥 살 뿐인데도 우주적인 질서 에너지가 일상(日常)의 모든 순간 순간을 가득 채우게 되고 넘실거리게 돼요[正信調直]! 그래서 삶은,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서 더 없는 축복이 되는 것이구요!

    57. 一切不留 無可記憶 (일체불류 무가기억)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그와 같이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현재'에 있게 되어 비로소 '현재'를 살게 되면, 이전에 없던 많은 새로운 <발견>들을 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으뜸인 것은 이 '현재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대해 깊이 눈뜬다는 거예요! 아, 이 '현재'는 얼마나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요!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나' ― 우리 각자 자신 ― 도 사실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얼마나 나눌 것이 많고 넉넉하며 아름다운 존재인지요!
    이렇게 모든 것이 새롭고 눈부시게 보이기 시작하는 이 '새로운 탄생'을 성경은 다음과 같은 벅찬 감동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無可記憶].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 지니라."(이사야 65:17∼18) 아멘!
    그런데 이 '현재'는 끊임없이 흐르거든요? 단 한 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고 언제나 변화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불가(佛家)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도 합니다만, 어쨌든 우리 마음[心]이 끊임없이 흐르는 이 '현재'와 계합(契合)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언제나 새롭고도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순간의 '현재'는 언제나 새롭고 역동적이며, 항상적인 생동감으로 가득 하거든요? 그러니 참 '사는 맛'이 나는 거지요.① 거기 어디에도 '기억'의 무게가 묻을 자리가 없습니다[無可記憶]. 다만 존재할 뿐이지요.

    ① 이를 일러 금강경(金剛經)에서는 "應無所住而生其心(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8. 虛明自照 不勞心力 (허명자조 불로심력)
         텅 비고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무엇이 텅 비고 밝아 스스로 비추느냐 하면, 앞에서 말한 '문제' 자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즉 '문제' 자체가 이미 '虛明自照' 하여 애써 마음쓸 일 아니건만[不勞心力], 우리는 끊임없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답'을 구하려 하지요. 아뇨, 그런 '답'은 없어요. 왜냐하면 '문제' 자체가 이미 '답'이요[虛明自照], 또한 '답'을 구하는 자가 이미 '답'이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답'을 구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언제나 마치 '답'을 버리고 '답'을 구하는 것과 같아요. 불가능한 일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문제'라고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번뇌(煩惱), 중생(衆生), 부족, 게으름, 불안, 화, 미움, 막막함, 우울 등은 사실 그 각각의 것들이 하나 하나의 '에너지'예요, 그 자체로서 가득 차 있는!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갖고 있어서 ― 거의 맹목적으로! ― 대뜸 그것들을 '문제'시 하고는 극복하려 하거나 거부하려 하지요. 다시 말하면, 그러한 '에너지'들을 전혀 살아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 한 번만이라도 그러한 '에너지'들을 긍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들을 극복하거나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는 노력들을 정지하고 가만히 그 속에 있어 보면, 그 '문제'들이 사실은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 ― 진아(眞我), 자성(自性), 보리(菩提) 등등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 임을 알게 돼요. 즉, '문제' 자체가 사실은 바로 '답'이었음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가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心]이 바뀌면서, 사실은 해결해야 할 '문제' 자체가 이미 처음부터 없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노자(老子)도 이와 같은 절묘한 생(生)의 반전(反轉)과 비약(飛躍)을 도덕경(道德經)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②

    大成若缺
    大盈若沖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큰 이룸'[大成]은 마치 아직 부족한 듯하고
    '큰 가득참'[大盈]은 마치 텅 빈 것 같으며
    '큰 곧음'[大直]은 마치 굽은 것 같다.
    '큰 정교함'[大巧]은 마치 졸렬한 듯하고
    '큰 말잘함'[大辯]은 마치 어눌한 것 같다.

    ② 도덕경 45장 참조.

    보세요, 우리 자신과 우리네 인생(人生)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모두가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자신을 못견뎌하며 끊임없이 대성(大成), 대영(大盈), 대직(大直), 대교(大巧), 대변(大辯)으로 나아가려고 하구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노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 눈에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로 보이는 그것이 사실은 대성(大成)이요 대영(大盈)이며 대직(大直)이요 대교(大巧)요 대변(大辯)이라구요! 정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不勞心力]. 오히려 무언가를 해서 자신을 완전케 하려는 그 마음만 내려놓으면, 그 자리가 바로 도달하려는 자리임을 알게 돼요. 그와 같이 진실로 진실로 가만히 있어 보면 ― 無爲, 止, Let it be! ― 정말 오래지 않아 '문제' 자체가 사실은 '답'이었음을 <스스로> 보여줄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기란 그렇게 쉬운 거예요.

    59. 非思量處 識情難測 (비사량처 식정난측)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니, 의식과 감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그래요,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닙니다. '생각'은 이미 분별심(分別心)이요,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도록 조건지어져 있는데, 그것이 어찌 둘 아닌 자리 ― 불이(不二) ― 를 알 수 있겠습니까? 진리의 자리는 그와 같이 생각과 의식과 지식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識情難測]. 오히려 그 모든 것이 내려질 때 오롯이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진리라고나 할까요?

    60. 眞如法界 無他無自 (진여법계 무타무자)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진여법계(眞如法界)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예요.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그 한 생각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만 내려지면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예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바로 진여법계(眞如法界)요 번뇌(煩惱)가 또한 진여(眞如)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여(眞如)'라는 말이 '진실로 있는 그대로'라고 할 때, 그렇다면 우리 자신과 삶 속에 실제로 그리고 늘 있는 게 뭐예요? 그것은 온갖 욕망과 이기(利己)와 망상(妄想)들과, 때때로의 불안과 우울과 게으름 등과,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의 들끓는 칠정(七情)과, 식욕·성욕·수면욕·재물욕·명예욕의 오욕(五慾)과, 생로병사(生老病死)와……등등이 아닌가요? 다시 말하면, 아무리 봐도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할 뿐이어서 도무지 해결해야 할 '문제'로밖에 보이지 않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 뿐이잖아요? 맞아요!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에게는 그러한 '현재'밖에 없어요! 또한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요, 우리네 삶이예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진실로 진실로 그러한 줄을 알면, 진실로 지금 여기에서의 '나'와 지금 여기에서의 삶 이외에 다른 것이 없음을 알게 되면, 그땐 있는 그대로의 '나'와 '현재'를 부정하거나 극복하려는 모든 마음들이 정지[止]할 것이고 ― 왜냐하면 그 외에 다른 것이 없음을 진실로 알았으니까요! ― 그러면 비로소 '현재'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어, 마침내 그·모·든·'문제'·들·에·도·불·구·하·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쉼을 얻게 돼요.
    진리는 그렇게 오는 거예요. 그리고 이를 이름하여 '깨달음'이라고도 하고 '해탈(解脫)'이라고도 하며 '불이(不二)'라고도 합니다만, 어쨌든 이때 우리에게는 일생일대의 존재의 비약(飛躍)이 와요, 다시 '문제'에 매이지 않는―! 그리고 그렇게 '해방(解放)'된 마음 안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어요[無他無自]. 모든 무게가 제로(zero)가 되어 비로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깊은 이해 속에서 '사랑'이 나와요! 모든 것을 진실로 살릴 수 있고 진실로 껴안을 수 있는―! 그런데 그 '사랑'이 바로 우리의 본질, 우리의 실상(實相)이랍니다.

    61. 要急相應 唯言不二 (요급상응 유언불이)
         재빨리 상응코자 하거든 오직 둘 아님을 말할 뿐이라.

    그래요, 둘이 아니예요. 오직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와 '현재'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기'가 아니라 '저기',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보다 완전하고 완벽한 무엇이 있을 것 같은 그 마음 ― 바로 이것이 허구(虛構)예요! ― 만 내려지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돼요.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지, 혹은 '진리'가 무엇인지 등등을요.③ 따라서 생(生)의 모든 갈증이 끝이 나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③ 사실 이렇게 말하기보다는, 그러한 의문들이 내 안에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 달리 그러한 것들을 찾거나 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참나[眞我]'니 '진리(眞理)'니 하는 것이 알아야 할 '답(答)'으로서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어느 순간에 '구하는 마음'이 정지하고 나면, 사실은 따로이 '답'이라고 할 것도 없고, 또한 지금까지의 삶 전체가 단 한 순간도 '답' 아님이 없었음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62. 不二皆同 無不包容 (불이개동 무불포용)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그래요, 다른 길이 없어요. 왜냐하면 오직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와 '현재'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12) 아멘!

    63. 十方智者 皆入此宗 (시방지자 개입차종)
         온 세상의 지자(智者)들도 모두 이 근본으로 들어온다.

    사람에게는 '거듭남'이라는 게 있습니다. 성경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 13:11)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시 의문(疑問)하지 않으며 다시 방황하지 않으며 다시 목마르지 않는 진정한 성숙과 풍요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요, 진리를 깨닫는 길이며, 참나[眞我]를 아는 길이요, 자기 자신에 닿아 비로소 자기 자신을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길이 정확히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와 '현재' 속에 올올이 녹아 있습니다. 아니,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와 '현재'가 이미 그것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지자(智者)들도 '여기[此岸]'가 아니라 '저기[彼岸]'를, '중생(衆生)'이 아니라 '부처'를, 결(缺)·충(沖)·굴(屈)·졸(拙)·눌(訥)이 아니라 대성(大成)·대영(大盈)·대직(大直)·대교(大巧)·대변(大辯)을 구하다가, 그것이 사실은 둘이 아니었음[不二]을 깨달으면서, 황망히 버리고 떠났던 그 처음의 자리로 돌아와 이제는 고요히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삶을 긍정하며 받아들이며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 사람들입니다. 진리는, 알고 보면, 뜻밖에도 별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별 것 아닌 것 속에 '무한한 별스러움'이 있는 줄은 사람들이 모르는 거지요.

    64. 宗非促延 一念萬年 (종비촉연 일념만년)
         근본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곧 만년이요

    내가 이미 '그것'이니, 거기 어디에 길고 짧음이 있으며, 빠르고 늦음이 있겠습니까? 또한 오직 지금 여기밖에 없으니, 이 순간이 곧 영원이요 이 자리가 바로 모든 것이지요. 그리하여 매 순간 순간을 100% 몰입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아, 그 눈부심이여―!

    65. 無在不在 十方目前 (무재부재 시방목전)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으니, 온 세상이 바로 눈앞에 있도다.

    그래요,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란 언제나 바로 우리 눈앞에 한결같이 펼쳐져 있습니다. 단 한 순간도 감춰진 적이 없고, 단 한 순간도 드러나 있지 않은 적이 없어요. 정말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萬有)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主宰)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萬民)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하며 있느니라."(사도행전 17:24∼28)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에 진리 속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진리를 구하는 이 아이러니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66. 極小同大 忘絶境界 (극소동대 망절경계)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보세요, 바로 앞 65번에서는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고, 또 그 앞 64번에서는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이제 '크다' '작다'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저 자신의 '작음'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저를 언제나 '소주잔'에 비유하며 끊임없이 자학하면서 '맥주잔'이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소주잔'인 제가 보기에 '맥주잔'은 너무나 크고 넓고 아름다워 보였으며, 그렇게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기만 하면 그동안의 저의 모든 갈증과 메마름도 끝이 나 비로소 저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맥주잔'이 되기를 갈망하며 그 오랜 세월 노력했던지요!
    그러나 '해방(解放)'은 그렇게 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맥주잔'이 됨으로써 '해방'이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은 '소주잔'임을 깨달음으로써 깊디깊은 존재의 쉼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어느 순간 제가 '소주잔'임을 알고 나니까 ― 즉, 간택(揀擇)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니까[忘絶境界] ― '소주잔'은 결코 '맥주잔'보다 작은 것이 아니었으며, '맥주잔'은 '소주잔'보다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 어디에도 '크다' '작다'가 없었으며, '소주잔' 거기에 온 우주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 '소주잔' 그것이 바로 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참나[眞我]'일 줄이야!
    그런데 보세요, 저는 이미 처음부터 '소주잔'이었으며, 단 한 순간도 '소주잔'이 아니었던 적이 없잖아요? 그런데 '맥주잔'을 부러워하기 시작한 그 한 마음 때문에 그 오랜 세월 저는 언제나 '소주잔'이었으면서도 단 한 순간도 '소주잔'으로서의 평화와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아, 그와 같이 우리는 이미 평화로우며, 이미 '해방(解放)'되어 있어요! 달리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67. 極大同小 不見邊表 (극대동소 불견변표)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지극히 큰 것, 이를테면 도(道)나 진리(眞理)나 '존재의 완전한 해방' 같은 것은 정확히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지극히 작은 번뇌(煩惱)를 떠나있지 않습니다. 진실로 이 사실을 알면, '안'이니 '밖'이니 하는 것도 없고, '번뇌'니 '보리(菩提)'니 하는 것도 없음을 동시에 알게 되지요.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68. 有卽是無 無卽是有 (유즉시무 무즉시유)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이를테면, 우리네 인생(人生)에 있어서 '있어서'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에 <집착>한 무게만큼 그것의 상실인 '없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만약 '있음'에 대한 집착이 제로(zero)라면, 그 '없음'이 그렇게 큰 고통과 상실로 다가올까요? 마찬가지로, '삶'에 집착한 만큼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요? 만약 '삶'에 대한 깊은 이해로써 모든 것을 다만 감사하며 사랑하며 산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현격하게 자리하고 있을까요? 그는 때가 되면 선선히 '죽음'에게 그 '삶'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에 과연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이는 결국 '마음'의 문제이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집착을 놓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즉 이미 그 마음에 간택(揀擇)함이 사라진 사람에게 '있음'과 '없음'은 같은 것이요 하나입니다[不二].

    69. 若不如此 不必須守 (약불여차 불필수수)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다.

    어떤 번역서에 보면,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만약에 이와 같지 않거든 모두 갖다 내버려라!"라고 되어 있는데,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이것 뿐이라는 말이지요.

    70. 一卽一切 一切卽一 (일즉일체 일체즉일)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이니

    하나는 곧 모두요, 모두는 곧 하나입니다. 부분은 곧 전체요 전체는 곧 부분입니다. 그것은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현격하게 둘로 나누는 것은 실재(實在)가 아니라 우리의 관념입니다. 곧 허구(虛構)이지요. 그러므로 이제 깨어나십시오. 눈을 뜨고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이 생명의 장(場), 이 축제의 장(場)에서 너울 너울 삶의 춤을 춰보십시다. 아, 그 오랜 세월 무지(無知)와 착각으로 인해 주눅들어 있던 온 가슴을 활짝 펴고 말입니다!

    71. 但能如是 何慮不畢 (단능여시 하려불필)
         다만 능히 이와 같다면 마치지 못할까 무얼 걱정하랴.

    그래요, 이것이 다입니다.

    72. 信心不二 不二信心 (신심불이 불이신심)
         신심(信心)은 '불이(不二)'요 '불이'가 곧 신심이니

    참 마음은 '불이(不二)'의 마음이요, '불이'임을 안 그 마음이 참[眞]이라는 것이지요.

    73. 言語道斷 非去來今 (언어도단 비거래금)
         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과거·미래·현재가 아니로다.

    언어(言語)는 곧 사고(思考)요, 사고는 곧 분별(分別)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나누고 구별하고 또한 규정하지요. 이를테면, 과거·현재·미래와 같이 '언어'는 존재하나 실재(實在)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언어를 가지고 승찬(僧璨) 스님은 지금까지 언어 너머의 것을 말해 왔습니다. 언어는 분명히 '한계'를 가지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히 그 '한계'를 뚫고 우리에게 넘실거려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충분히 그 얘기를 나누었구요.
 
    이제 그와의 만남의 시간을 끝내려고 합니다. 승찬 스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끝나지만, 그와 함께 나누고 흘렀던 그 모든 것은 호흡처럼 우리 가슴에 남아 우리를 숨쉴 것입니다.
승찬 스님은 다시 말합니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을 버려라.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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