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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信心銘) 강의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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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7,186회 작성일 06-02-0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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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信心銘) 강의 ― (5)
 
 
    안녕하세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신심명(信心銘) 26번부터 읽겠습니다.

    26. 能隨境滅 境逐能沈 (능수경멸 경축능침)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기는데

    27. 境由能境 能由境能 (경유능경 능유경능)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이 26번과 27번에 대한 설명은 제가 지난 94년 4월 대구 영남일보를 사표내고 50일 단식(斷食)을 하기 위해 올라갔던 경북 상주 극락원이라는 암자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땐 참 절박했습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궁극에의 갈증' 하나가 해결되지 않으니 도무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식으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가장(家長)으로서도, 직장생활에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했으나 내면은 항상적인 목마름에 거의 입술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고, 이것은 그 무렵이 절정이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마침내 또다시 사표를 내고 상주에 있는 극락원이라는 자그마한 암자에 50일 단식을 하러 갔는데, 우선 그 '궁극에의 갈증'부터 해결하고서야 숨을 쉬더라도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 처자식마저 버려 두고 길을 떠나왔고,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기에 모든 외적 움직임을 정지하고 그저 단식하며 고요히 명상하기만 하면 진리가 저절로 내 앞에 나타날 줄 알았습니다. 정말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 당시 나는 주로 '관법(觀法)'이라는 수행법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때 그때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과 느낌 등을 <판단>하지 않고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인데, 그렇게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다 보면 그 어느 한 순간 확연히 내가 그토록 찾던 어떤 '결론'이나 '답(答)' 같은 것이 나타나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참 안타깝고도 절망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내면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과 느낌 등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놓치지 않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솟구치는 온갖 잡생각과 망상(妄想) 속에 빠져 그저 허우적댈 뿐 단 한 순간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오직 놓치지 않고 성성히 '지켜보는' 속에서 깨달음이랄까 인생의 궁극의 답(答) 같은 것을 구하던 저에게 지켜보기는커녕 끊임없이 놓치고만 있는 자신을 목격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당할 길 없는 열패감과 깊디깊은 절망감 같은 것을 안겨다줬습니다.
    '아아, 여기에서도 결국 실패하고 마는가……'
    '다 된 줄 알았더니, 정말이지 조금도 되어있질 않구나. 이럴 수가……!'

    그런데 그때의 나의 내면의 구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켜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내면의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과 느낌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어떤 '궁극의 답(答)' 같은 것을 구하다 보니 자연히 마음의 무게의 중심은 '지켜보는 자'에게 가있었고, 따라서 '바라보이는 대상들'은 그저 쓸데없는 잡생각과 망상(妄想)들로밖에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아, 얼마나 많은 잡생각들과 망상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나던지요!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그야말로 망상덩어리였습니다!
    이럴 어쩌나, 이 감당할 길 없는 무수한 망상들을 어찌 할거나……. 어떻게 하면 이 끝없는 망상과 잡생각들을 잠재우고 고요한 '참나[眞我]'의 자리에 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 톨의 망상과 번뇌도 틈입하지 않는 깨달음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마침내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결론은 전혀 엉뚱하게도, 정반대로 나버렸습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성성히 지켜보려 하던 바로 그 놈 ― '관찰자' ― 이 사실은 미망(迷妄)이요 허구요 분별심(分別心)이었으며, 어떻게든 떨쳐버리려고 애쓰던 그 무수한 잡생각과 망상과 번뇌가 사실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자성(自性)'이요 '보리(菩提)'요 '진아(眞我)'였습니다! 오, 이런!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한바탕 긴 꿈을 꾸었단 말인가?
    아아, 그랬습니다, 그렇게 문득 눈을 뜨고 보니 내 안의 그 어떤 잡생각과 망상도 '자성(自性)' 아님이 없었으며, 그 어떤 번뇌도 '보리(菩提)'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참나[眞我]'가 아닌 적이 없었으며, 그토록 혐오스럽던 이 부족하고 못난 중생(衆生)의 모습 그대로가 부처였습니다. 아아, 나는 이미 처음부터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안에서 '지켜보는' 그 놈이 사라져 버렸고, 그 놈이 사라지고 나니 오직 '대상'들만 남았는데, 오직 '대상'들만 남으니 이젠 '대상'이라고 할 것도 없어져버린 것입니다[能隨境滅 境逐能沈]. 그러고 나니 이번엔 또다른 이해의 비약(飛躍)이 오는데, 즉 주(主)-객(客)이 사라진 그 자리엔 '번뇌'도 없고 '보리'도 없었으며,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고, '망상'도 없고 '자성'도 없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존재의 해방(解放)'을 맞았고, 모든 구속으로부터 풀려났으며, 동시에 그토록 마시고 싶어하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①을 마시게 된 것입니다. 아아,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하던지요!

    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

    28. 欲知兩段 元是一空 (욕지양단 원시일공)
         양단을 알고자 하는가, 원래 하나의 공(空)이니라.

    그래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양단(兩段)'이란 곧 허구(虛構)예요. 있지도 않는 허깨비[幻]와 같은 것이지요. 조금 뒤에 나오는 신심명 45번에 '夢幻空華 何勞把捉'(꿈 속의 허깨비와 허공 속의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번뇌'를 버리고 '보리[깨달음]'를 구하는 것이나 '망상'을 버리고 '자성'을 구하는 것, 그리고 '중생'을 버리고 '부처'를 구하는 것 등의 모든 '취(取)'와 '사(捨)'가 다 '夢幻空華 何勞把捉'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양단(兩段)이 실재하는 양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면 그 사람은 실패하기 마련이고, 부여잡는다면 잃어버리게② 되어 있습니다.

    ② 爲者敗之, 執者失之. 도덕경 29장.

    '원래 하나의 공(元是一空)'이란 곧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우리의 미망(迷妄)과 분별심(分別心)이 내려진 '있는 그대로의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끊임없이 '번뇌'라 하고 '중생'이라 하며 취사(取捨)했으나, 사실은 번뇌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 그냥 이대로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따로이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잖아요? 모든 것이 다만 공(空)할 뿐입니다.
    금강경(金剛經) 제17분(分)에도 보면, "如來者 卽諸法如義"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여래(如來)라는 것은 곧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일 뿐이라는 뜻이니라."라는 말입니다. 부처를 지칭하는 10가지의 존칭 가운데 하나인 '여래(如來)'의 뜻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일 뿐'이라는 말이라니, 참 재미있습니다.

    29. 一空同兩 齊含萬象 (일공동량 제함만상)
         하나의 공(空)이 양단(兩段)과 같음이 만상(萬象)을 다 포함하여

    그렇게 일체 모든 분별심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볼라치면, 그는 이전과 똑같이 일체 모든 것을 분별하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는 '좋음'도 있고 '싫음'도 있으며, '취(取)'도 있고 '사(捨)'도 있고, '간택(揀擇)'도 있습니다. 또한 '사랑함'과 '미워함'도 있으며, '생(生)'과 '멸(滅)', '늙음'과 '죽음', '더러움'과 '깨끗함'도 있습니다. 즉 "만상을 다 포함한다(齊含萬象)"는 말이지요. 그러나 또한 그 모든 것이 공(空)함을 알기에 그 어디에도 끄달리거나 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어느 것 속에서도……,

    30. 不見精추 寧有偏黨 (불견정추 영유편당)
         세밀함과 거칠음을 보지 않으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그렇지요. 그 어느 것 속에서도 세밀함과 거칠음을 보지 않으니, 즉 간택(揀擇)하지 않으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29번에서는 '간택함'도 있고 '취사(取捨)'도 있다고 했다가 지금은 또 그 어느 것에서도 세밀함과 거칠음을 보지 않아 간택함이 없다고 하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간택하되 간택함이 없고, 취사(取捨)하되 취사함이 없는 이 도리를 아시겠어요?

    31. 大道體寬 無易無難 (대도체관 무이무난)
         대도(大道)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말하자면, 도(道) 아님이 없으니(大道體寬), 즉 이를 달리 말하면, 내가 이미 '그것'이니 거기 어디에도 '쉽다' '어렵다'의 문제가 틈입할 여지가 없지요. 아아, 그런데 이러한 '앎'에 이르는 것이 쉬우려면 한없이 쉽건만, 어려우려면 몇 겁(劫)을 돌아도 안 되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입니까!

    32. 小見狐疑 轉急轉遲 (소견호의 전급전지)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디어지는구나.

    왜 서두르는지 아세요? 빨리 가고 싶으니까요! 어디를요? '저기[彼岸]'를요! 그런데 도달해야 할 '저기' ― 깨달음, 부처, 참나[眞我], 득도(得道)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 라는 게 있어요? 아뇨, 없어요. 그런 것은 우리의 관념 속에나 있지 실재(實在)하지 않아요. 우리가 도달하려는 그곳은 정확히 '지금' '여기'에요. 우리는 이미 도달해 있어요. 그러니 그곳에 빨리 도달하고자 서둘러 갈수록 더욱 더딜 수밖에요! 그것은 마치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지금 여기에 도달하려는 어리석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아, 어떻게 하면 이런 말들이 진정으로 여러분의 가슴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요? 노자(老子)도 애틋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不出戶 知天下,
    不窺유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明],
    不爲而成.

    '나'라는, '현재'라는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천하를 알며,
    '번뇌'라는, '중생'이라는 창문 밖을 내다보지 않고서도 하늘의 도(道)를 보나니,
    그 나감이 멀면 멀수록 그 앎은 더욱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행하지 않고서도 알고,
    보지 않고서도 밝으며,
    하지 않고서도 이룬다. (도덕경 47장)

    33. 執之失度 必入邪路 (집지실도 필입사로)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그런데 이 '삿된 길'이란 것이 정말 '삿된 길'로 보이면 누가 가겠습니까? '삿된 길'은 삿된 길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정도(正道)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와 같이 분명히 '삿된 길'이지만, 그것이 우리 눈에는 명백히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는 길로 보이니 가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보세요, 그 '사로(邪路)'란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 보면, '번뇌'를 버리고 '깨달음'에로 나아가려는,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는, 그리하여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버리고 미래의 보다 완전한 자신이 되려는 일체의 몸짓들이 사실은 모두가 '사로로 들어가는 것(必入邪路)'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눈에는 얼마나 마땅하고도 당연한 정도(正道)로 보입니까? 그러니 이게 참…….
    예수도 말했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라구요.
    보세요, 또한 송(宋)나라 때의 선사(禪師)인 불인료원(佛印了圓)의 게송(偈頌)에도 다음과 같은 것이 있어요.

    道在當人眼睫裡
    西來面目只如今
    渴飮饑손常顯露
    何用區區向外尋

    도(道)가 그대 눈썹 안에 있거늘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지금도 묻고 있는가?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데서 한결같이 환하게 드러나는데,
    어찌하여 구구히 밖을 향해 찾을꼬?

    참 기가 막힌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34. 放之自然 體無去住 (방지자연 체무거주)
         놓아 버리면 저절로 그러하니,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같은 송(宋)나라 때의 선승(禪僧)인 차암수정(此庵守靜)의 시(詩)에도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流水下山非有意요
    片雲歸洞本無心이라.
    人生若得如雲水면
    鐵樹開花遍界春이리.

    흐르는 물이 산 아래로 내려감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한 조각 구름이 마을에 드리움은 본래 무슨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만약 우리네 인생이 한 조각 구름이나 물과 같은 마음을 얻는다면
    쇠나무[鐵樹]에 꽃이 피어 온 세상에 봄기운 가득하리.

    그런데 이 시(詩)를 우리 내면으로 가져가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다시 읽어보면,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네 삶 속에서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慾)의 칠정(七情)이 시시로 때때로 우리 안을 흘러감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이런저런 번뇌와 망상의 구름이 어느 날 문득 내 삶 위에 드리움은 본래 무슨 마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일어났다가 그냥 사라질 뿐이며, 그냥 그렇게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들을 그냥 놔두면(Let it be) 돼요. 그냥 놔두면 저절로 그러하여(放之自然) 오히려 삶 전체가 눈부신 질서와 조화로 가득 차게 됩니다. 보세요,

    35. 任性合道 逍遙絶惱 (임성합도 소요절뇌)
         본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한가히 거닐면서 번뇌가 끊기지만,

    기쁨이면 기쁨, 슬픔이면 슬픔, 분노면 분노, 짜증이면 짜증대로의 본래 그러한 성품들대로 그냥 맡겨두면, 그리하여 그것을 '깨달음' 등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조절하거나 통제하거나 다스리려 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도에 합하여(任性合道), 그냥 살 뿐인데도 저절로 번뇌가 끊어져 삶에 기쁨이 넘쳐흐르게 됩니다(逍遙絶惱). 얼마나 쉬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오히려 모든 충만을 단번에 삶 속에 이루어버리는 이 기가 막힌 반전(反轉)과 비약(飛躍)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36. 繫念乖眞 昏沈不好 (계념괴진 혼침불호)
         생각에 얽매이면 '참[眞]'과 어긋나, 어두움에 빠져 좋지가 않다.

    그런데 '생각'에 빠지면, 즉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분별심(分別心)에 빠져 간택(揀擇)하고 취사(取捨)하기 시작하면 '참[眞]' 혹은 '실재(實在)'와는 어긋나 버립니다. 지난 시간에 읽은 신심명 17번에서 말한 것처럼, 수조(隨照)하면 즉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가면 실종(失宗)이라, 근본을 잃어버린다는 말이지요.

    37. 不好勞神 何用疎親 (불호노신 하용소친)
         정신을 피곤하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찌 친(親)-소(疎)를 쓸 건가.

    친(親)-소(疎)란 곧 간택(揀擇)함을 말하는데, 이는 다시 신심명의 맨 처음에 나오는 '至道無難 唯嫌揀擇'(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만 버려라)을 연상케 합니다.

    38. 欲趣一乘 勿惡六塵 (욕취일승 물오육진)
         일승(一乘)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六塵)을 미워하지 말라.

    일승(一乘)이란 모든 존재가 올라타는 하나의 큰 수레를 말하는데, 이는 곧 진리 혹은 깨달음, 참나[眞我]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지극한 도[至道]'를 말합니다. 그리하여 진정 지극한 도(道)에로 나아가고 싶거든, 즉 깨달음을 얻고 싶거든 말입니다, 육진(六塵)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육진(六塵)이란 곧 번뇌를 가리키는데, 그 번뇌가 바로 '보리(菩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번뇌 혹은 망상을 미워하여 그것을 버리고서 도(道)에 이르려 하는 한 결단코 진리는 내게 오지 않습니다. '존재의 완전한 해방(解放)'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예요. 39번을 보세요.

    39. 六塵不惡 還同正覺 (육진불오 환동정각)
         육진(六塵)을 미워하지 않으면 홀연히 정각(正覺)이라.

    육진(六塵)을 미워하지 않게 되면, 이 번뇌와 망상을 미워하지 않게 되면, 즉 그것과 하나가 되면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정각(正覺)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 말이지요.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쓴 혜능(慧能)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於六塵中에 不離不染하야 來去自由가 卽是般若三昧며 自在解脫이니……육진(六塵) 가운데에서 그 육진을 떠나있지도 않고 그것에 물들지도 않아 육진이 오고 감에 자유함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니……." 이 신심명 39번과 똑같은 말이잖아요?

    40. 智者無爲 愚人自縛 (지자무위 우인자박)
         지혜로운 사람은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얽매이도다.

    그런데 이 '우인(愚人)'이 우리 눈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보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 즉 '無爲' 혹은 '止' 혹은 'Let it be' 하면 ― 크게 어리석거나 무언가 잘못된 사람으로 보이니, 이럴 어쩌면 좋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 얽매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41. 法無異法 妄自愛着 (법무이법 망자애착)
         법에는 다른 법이 없건만,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그래요, 진리에 이르는 길은 다른 길이 없어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정하거나 제외하고서는 그 어떤 수고와 방법과 노력을 통해서도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가 이미 '그것'이니까요.
    살아오면서 제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온갖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할 수 있는 모든 효과적인 방법들을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조금도 개선되지 않은 채 성성히 내 앞에 있었고, 아아 나는 그 초라하고도 환멸스러운 모습에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문제'를 바라보던 내 '눈' ― 곧 마음[心] ― 이 달라져 버렸고, 그 달라진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니, 오호라, '문제'라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의 나이로되 그것이 도무지 '문제'로 보이지 않으니 어떡합니까, 그냥 살밖에요! 그렇게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제게 '해방(解放)'이 찾아왔고, 그때 이후 지금까지 저는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롭게 잘 사는지요!
    그렇게, 지금 여기에서의 부족하고 못난 '나'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짐으로써 그 '부족' 자체가 부족해 보이지 않고, '중생(衆生)' 자체가 중생으로 보이지 않아, 어느 순간 해결해야 할 '문제'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리는 이 '비약(飛躍)'의 길 외에는 진리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어요. 정말요!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는 자신의 수고와 다함 없는 노력으로써 자신을 완전케 하려 하지요. 아아, 그 아뜩하고도 먼 길이여―!

    42. 將心用心 豈非大錯 (장심용심 기비대착)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겠는가.

    그래요, 이 '마음'이란 곧 분별심(分別心)을 말하는데, 그것은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버립니다. 그리곤 그 둘 가운데 '실재(實在)하는' 하나는 버리고, '있지도 않는'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취하려 하니, 그것이 가능키나 한 일이겠어요?

    43. 迷生寂亂 悟無好惡 (미생적란 오무호오)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지만, 깨치면 좋음과 싫음이 없거니

    44. 一切二邊 良由斟酌 (일체이변 양유짐작)
         모든 두 가지 견해는 오직 짐작하고 헤아림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모두가 '마음'의 장난이며, '마음' 안에서의 착각일 뿐입니다. 원효(元曉)도 그랬지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45. 夢幻空華 何勞把捉 (몽환공화 하로파착)
         꿈속의 허깨비와 허공 속의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꿈 몽' 자[夢]에 '허깨비 환' 자[幻]요, '빌 공' 자[空]에 '꽃 화' 자[華]예요. 꿈 속 허깨비와 허공 중에 핀 꽃이라는 말이지요. 있지도 않는 그러한 것들을 어찌 그리도 애써 잡으려 하는가 라는 말입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모든 몸짓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46. 得失是非 一時放却 (득실시비 일시방각)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라.

    어떻게 일시(一時)에 놓을까요? 예를 들어, 제가 손에 똥닦은 휴지를 들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놓을까요? 아니, 도대체 <어떻게> 라는 말이 성립하겠어요? <어떻게>를 묻기 이전에 진실로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똥닦은 휴지'인 줄만 안다면, 그저 화들짝 놀라며 단번에 그것을 놓아버리지 않겠어요? 그와 같이, 자기 손에 부여잡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알기만 하면 놓아라 어째라 하기도 전에 벌써 잡고 있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일시방각(一時放却)하는 거기 어디에도 사실 <어떻게>는 있을 수가 없어요. 그냥 놓아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 많은 사람들이 들고 있는 것이 사실은 '똥닦은 휴지'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의 눈에는 참으로 버리기 아까운 무엇으로 보이거나, 더욱이 남들이 갖고 있지 못한 무슨 귀한 보배쯤으로 보이니, 어디 버릴 마음이 나겠어요?

    47. 眼若不睡 諸夢自除 (안약불수 제몽자제)
         눈에 만약 졸음이 없다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리라.

    그렇지요, 만약 눈에 졸음이 없다면, 아니, 잠을 깼다면 이미 더 이상 꿈속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밝은 빛 아래 모든 것을 다만 있는 그대로 보게 되어, 살아있음의 눈부심 속을 너울너울 춤추게 되지요. 아, 살아있음은, 그리하여 이 아름다운 세계 속에 존재함은 정말 축복입니다, 지복(至福)입니다!

    48. 心若不異 萬法一如 (심약불이 만법일여)
         마음이 만약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같느니라.

    하나가 열리면 모든 것이 다 열려요(萬法一如).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비교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으면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이 '현재' 속에 존재할 수 있다면, 그 한 번의 경험이 여러분의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아요. 정말요! 
성경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처럼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이사야 65:17∼18) 또한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境內)에 다시 없을 것이며……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 ― 진리 ― 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이사야 60:18∼20) 아멘, 아멘, 아멘입니다!

    49. 一如體玄 兀爾忘緣 (일여체현 올이망연)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제가 저의 '문제'와 씨름할 때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은 '나는 누구인가?'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나[眞我]'를 알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알고 나니, 그 '참나'는 다름 아닌 '무아(無我)'였습니다. '무아(無我)'가 곧 '진정한 나'였다는 말입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게 되어버리니, 오히려 '나' 아님이 없는 세계가 문득 열려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모든 집착이 저절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니, 집착이란 것이 아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兀爾忘緣).

    50. 萬法齊觀 歸復自然 (만법제관 귀복자연)
         만법(萬法)을 두루 살핌에, 돌아가 저절로 그러함을 회복하는구나.

    모든 것은 다만 저절로 그러할 뿐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질서잡으려는 노력이 어느 순간 정지했을 때, 그때 비로소 본래부터 내 안에 있던 어떤 우주적인 질서에너지가 나를 질서잡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내가 본래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본래부터 우주적인 질서덩어리 그 자체(cosmos)였던 것을, 그 사실에 대한 무지(無知)와 분별심으로 인해 끊임없는 노력과 수고로써 나를 '질서잡으려' 했으니, 아아 그 '夢幻空華 何勞把捉'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제 그 모든 어리석은 노력들이 정지하고 나자, 비로소 내 안의 모든 것들도 본래 그러한 바대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歸復自然).

    51. 泯其所以 不可方比 (민기소이 불가방비)
         그 까닭을 없이하면 견주어 비교할 바가 없음이라.

    제가 이 신심명 강의를 시작할 무렵에 말씀드린, '케피소스 강가의 침대와 나그네'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요? 프로크루테스(Prokroustes)가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Kephisos) 강가에 침대를 하나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침대에 눕힌 다음 침대보다 키가 크면 잘라 죽이고 작으면 늘여 죽이다가 그 자신도 결국 바로 그 침대에서 테세우스에 의해 잘려 죽었다는 얘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침대는 '깨달음'이니 '참나[眞我]'니 '인격완성'이니 하는 등의 이름으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우리 내면에도 있어서,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들을 잘라버리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거의 타는 목마름으로 그 침대에 딱 맞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아아, 그러나 사실은 바로 그 '침대'가 허구(虛構)요 환(幻)입니다.
    그리하여 만약 그 '침대'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래서 나그네의 길고 짧음을 비교할 잣대가 사라져 버린다면(泯其所以),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긍정되어(不可方比), 내 안은 그야말로 모든 분열(分裂)과 긴장이 끝이 난 완전한 조화와 평화가 가득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52. 止動無動 動止無止 (지동무동 동지무지)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이것은 바로 지난 호에서 말씀드린 '불확정성의 원리'를 상기(想起)하시면 돼요. 즉 하나의 입자(粒子)는 '위치[止]'와 '운동량[動]'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치[止]'의 관점에서 보면 '운동량[動]'이 없고, '운동량[動]'의 관점에서 보면 '위치[止]'를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인데, 그러나 사실은 이 둘은 바로 '하나'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언제나 '운동량'이라는 측면 ― 이것은 모든 것을 비교선상에서만 바라보는 마음을 말합니다. 즉 내면의 '침대'를 성성히 두고 있는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을 말하지요 ― 에서만 자신을 바라보다 보니 언제나 '위치'라는 측면 ― '비교'가 끝이 난, 그래서 '침대'가 사라져버려 모든 나그네들이 그 자체로서 긍정받는 ― 을 놓치게 되는데, 삶의 어느 한 순간 문득 '위치'라는 측면이 우리 내면에서 열려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이 한 번의 '눈뜸'이 이후의 모든 삶[動] 속에서도 영원토록 '위치' ― '진정한 주인됨' ― 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여 진정한 존재의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53. 兩旣不成 一何有爾 (양기불성 일하유이)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늘 하나인들 어찌 있을 건가.

    그렇지요? 그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예요. 그러나 그 '하나'라는 것도 실체(實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거든요?

    54. 究竟窮極 不存軌則 (구경궁극 부존궤칙)
         구경궁극의 자리에는 어떠한 법칙도 있지 않다.

    그리하여 거기에는 이제 '이것이다!'라고 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깨달음'도 없고, '번뇌'도 없으며, '구경궁극(究竟窮極)의 자리'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입니다.
    금강경(金剛經) 제7분(分)에도 보면, "無有定法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所說"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완전한 깨달음)라고 이름할 만한 정해진 법이 있지 않으며, 또한 여래(如來)께서 설하실 만한 정해진 법도 있지 않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참 기가 막힌 말입니다만, 그러나 또한 분명히 무언가가 있기도 합니다. '이것이다!'라고 할 것이 없기에 오히려 더욱 명백히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십시다.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또한 앞에서 이미 충분히 말씀드린 얘기이기도 하기에 간단 간단하게 설명하며 막 달렸습니다만, 그러다 보니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웠던 부분이 있기도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아직 한 번의 강의 시간이 더 남아있기에 미흡했던 부분은 그때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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