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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 죽어야 진정 살리라

작성일 06-02-0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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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조회 19,323회 댓글 0건

본문

 
7장 ― 죽어야 진정 살리라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久―오랠 구, 且―또 차, 우선 차, 耶―그런가 야

    천지(天地)는 장구[영원]하다.
    천지가 능히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능히 오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그 몸을 뒤로 하되 오히려 그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돌보지 않되 오히려 그 몸을 보존한다.
    이는 그 사(私)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私)도 이룬다.

    < 뜻풀이 >
    햐―! 이 장(章)에도 노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는 삶의 <지혜>가 가득하구나! 노자(老子)는 참 희한하다. 어쩌면 그렇게도 삶과 인간의 진실(眞實)을 훤히 꿰뚫고 있는지, 어쩌면 그렇게도 그 진실들을 그토록 아름다운 언어와 넘치는 역설(逆說)과 반어(反語)로써 그토록 분명하게, 남김없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는지! 아, 어쩌면 그렇게도 시적(詩的)일 수 있는지―! 노자를 읽으면 읽을수록 밀려오는 감탄과 시원함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리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가 애틋하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진실>들이 언제나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 혹은 상식(常識)과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렇기는커녕 정반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안타까움은 논어(論語)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때에도 가슴 아프게 다가왔었다. "天理人欲之間每相反而已矣(하늘의 이치와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는 매양 서로 반대될 뿐이다.)" 이는 논어 자로편(子路篇) 가운데 "子曰 君子는 易事而難說也니 說之不以道면 不說也요 及其使人也하여는 器之니라. 小人은 難事而易說也니 說之雖不以道라도 說也요 及其使人也하여는 求備焉이니라(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君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뻐하게 하기는 어렵나니, 기뻐하게 하기를 道로써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으며, 사람을 부림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그릇에 따라 한다. 小人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뻐하게 하기는 쉽나니, 기뻐하게 하기를 비록 道에 맞지 않게 하더라도 기뻐하며, 사람을 부림에 있어서는 (모든 능력을) 구비하기를 요구한다.)"라는 본문(本文)의 주(註)에 나오는 말인데, 너무나 맞는 말이다 싶으면서도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가슴 아팠었다. 아, 사람들은 ― 또한 우리의 사고(思考)는 ― 진실(眞實, 참된 실재)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진실을 찾고 있다!

    예수의 말씀은 더욱 애틋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라고 하고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한복음 3:11∼12)라고 함에 이르러서는―! 아,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보여 자꾸만 그리로 들어가고자 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아예 문 같지도 않게 보이니, 정녕 이를 어찌 하랴!

    그렇다. 삶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 참된 것이랄까, 영원한 것, 변치않는 것, 혹은 자유(自由)랄까, 진리(眞理)라고 말해질 수 있는 무엇이 삶 속에는 분명코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이미 그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그것 ― I am That ― 이면서도 그러한 줄을 알지 못하기에, 안타깝게도 헛되이 <그것>을 찾아다니고, 헛되이 <그것>이 되려하면서, 아아, '누리는 자'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찾고 추구하는 자'의 메마름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숨가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잠시 우리의 '생각[思考]'과 '앎'을 내려놓고, 노자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에 가만히 귀기울여 보자. 정녕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나'를 내려놓아 보자.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천지는 장구[영원]하다.
    천지가 능히 장구한 까닭은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능히 오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자생(不自生)'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고, 바로 이것이 '진정 살 수 있는 길[道]'이기 때문이다. 不自生! 스스로 살려고 하지 말라! 죽어야 진정 살리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 3:7)
    그렇다면 이 '不自生'이란 뭘까? 무엇을 의미할까? 노자는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천장지구(天長地久)……"로 시작되는 이 장(章)에서 '不自生'이란, 천지(天地)의 '스스로 그러한[自然]'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천지는 만물(萬物)을 언제나 그 스스로 그러한[自然] 대로 내어버려 둔다. 어떤 것이 부족하다 하여 그것을 채우려 하지도 않고, 어떤 것이 약하다 하여 억지로 강하게 하려 하지도 않는다. 화사한 봄날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피어오르던 목련꽃의 한 순간의 낙화(落花)를 추하다 하여 멀리 하지도 않고, 이 가을 때때로 나를 얼어붙게 하는 황홀한 일몰(日沒)을 아름답다 하여 그것을 연장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또한 살아있음이 좋다 하여 방금 태어난 누(gnu)① 새끼가 사자밥이 되는 것을 막아주지도 않으며, 풍년(豊年)이 좋다 하여 가뭄과 홍수가 오지 못하게 하지도 않는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 하여 그것을 길게 늘이려 하지도 않으며, 학의 다리가 길다 하여 그것을 자르려고 하지도 않는다. 천지는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더 나은' 천지를 위해 노력하거나, '더 완벽한' 천지의 모습을 이루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것은 천지에게는 있지도 않다! 천지는 다만 천지로서, 스스로 그러할[自然] 뿐인 것이다. 그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삶이 곧 '不自生'이다. 그런데도 보라, 천지는 장구[영원]하다!(天長地久)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크낙한 질서와 조화 속에서 만물을 번성케 하는구나!

    ① 포유류 소목[偶蹄目] 소과(科)에 속하는 영양의 한 종. 소같이 앞으로 흰 뿔과 갈리, 꼬리에 긴 솜털이 있어서 뿔말이라고도 한다. 먹이의 98%가 풀이며, 새로운 풀을 찾아 건기(乾期)에는 1,600km가 넘는 거리를 대이동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천지 가운데의 한 존재로서, 천지가 그러하듯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음[不自生]으로써 오히려 진정으로 사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기는커녕 끊임없이 '더 나은' 자신을 위하여 ― 이것이 바로 '스스로 살고자 함[自生]'이다 ―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 안(內)의 물오리들의 다리를 짧다 하여 늘이려 하거나, 내면의 학의 다리를 길다 하여 힘겨워 하면서 그것을 자르고 있지는 않은가?② 케피소스(Kephisos) 강가에 침대를 하나 놓아두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그 침대에 누이고는 침대보다 키가 크면 잘라 죽이고 작으면 늘여 죽이던 프로크루스테스(Prokroustes)처럼③, 우리도 우리 내면에 '보다 완전한 나'라는 침대를 하나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나그네 곧 그때 그때의 우리 자신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과 말 등등을 이리저리 재어보고 헤아려 보고는 어떤 것은 길다고 잘라내고 어떤 것은 짧다고 애써 늘이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지 않는가?
    아, 그렇게 타는 목마름으로 '자기 완성'과 '자기 해방'을 위해 그 오랜 세월 몸부림쳐 왔건만, 아직 끝나지 않고 채워지지 않는 이 내면의 갈증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기 완성'과 '자기 해방'을 위해 나아가는 우리의 방향과 방법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이미 처음부터, 다시 말해, '자기 완성'과 '자기 해방'의 그 지난(至難)한 길로 우리를 들어서게 한 어떤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녕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② 3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의 (가)를 버리고 (나)로 가려고 하는―!
    ③ 그랬던 그도 바로 그 침대에서 테세우스에 의해 잘려 죽는다.

    '자기 완성'과 '자기 해방'을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은 현재(現在)의 자신이 무언가 '부족한' 미완(未完)의 존재라는 <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 '부족하다'라는 전제는 <사실>인가, 아니면 우리의 무지(無知)와 분별심(分別心)이 만들어낸 허구적이고 잘못된 <자기규정>에 불과한 것인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미처 이러한 것들을 자세히 따져보기도 전에 벌써 '자기 완성'을 향한 그 모호하고 힘겨운 길 위를 헐떡이며 달려가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달려가다 보면, 때로 열심이 부족할 때 채찍에 채찍을 더하다 보면 언젠가는, 아아 언젠가는, 이 질기고도 오랜 갈증이 끝날 때가 있겠지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오직 그 '완전'을 향한 노력만이 자신을 구제해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오직 그 방향만이 선(善)이요 '진정 사는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서 말이다.

    그런데, 진실(眞實) ― 참된 실재(實在) ― 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하늘의 이치와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바는 매양 서로 반대될 뿐일지도 모르며(天理人欲之間每相反而已矣), 우리 눈에는 분명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보이는 그것이 사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일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완전'을 향한 '나'의 이 눈물겨운 노력은 뭐란 말인가!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

    그렇다. 진리(眞理)는, 도(道)는, 진정한 '자기 완성'은 저기, 나 밖(外)에, '완전'을 향한 우리의 무한대의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전혀 뜻밖에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내 안에 있다. 내가 이미 <그것>이다(I am That)!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아니, 오직 이것만이 <사실>이다! 그러니,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완전'을 이루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고, 다만 '지금' '여기'에 머물라. 오직 '현재'를 살라. 미래의 '완전'을 향해 달려나가던 그 마음을 돌이켜, 다만 지금 현재의 그 '부족'을 살라. 그 '부족' 위에 머물라. 그것에 저항하지 말고, 그 '부족'을 믿어주고, 그것을 그냥 살아내어 보라.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해 보라.

    '깨달음'이랄까 혹은 '진리(眞理)'는 그러한 <돌이킴> 속에서 이윽고 그 소박하고 투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면 스스로 알게 되리라, 현재(現在)는 '부족'하지 않으며, '나'와 '삶'과 '세상'은 이미 처음부터 '완전'했음을―!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현재'로의 <돌이킴>이 바로 '不自生'이며, 그것은 '완전'을 향해 달려나가던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지식과 믿음과 노력의 포기,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아 죽어야 진정 살리라! 不自生!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 ― 곧 참된 실재(實在) ― 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 10:39)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그 몸을 뒤로 하되 오히려 그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돌보지 않되 오히려 그 몸을 보존한다.
    이는 그 사(私)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私)도 이룬다.

    '後其身'이니 '外其身'이니 하는 것도 '不自生' 하는 성인의 삶의 모습을 가리킴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보라, 그렇게 스스로 살고자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은 오히려 앞서고[而身先], 오히려 온전히 보존된다[而身存]. 오오, 이 놀라운 생(生)의 반전(反轉)과 비약(飛躍)이여―!
    이제 그 사람에게는 '앞'이니 '뒤'니 하는 것도 없다. 따라서 그 몸을 '뒤로 함'도, 그 몸이 '앞섰다'는 의식도 그에게는 없다. 단지 그냥 그의 '삶'이 있을 뿐이다. 단지 그냥 그의 '삶'이 있을 뿐이기에, 그에게는 사(私)도 없고, 또한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 모오든 사(私)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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