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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 진리에 이르는 문(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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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9,877회 작성일 06-02-0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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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 진리에 이르는 문(門)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谷―골 곡, 牝―암컷 빈, 골짜기 빈, 綿―연이을 면, 솜 면, 얽힐 면, 若―같을 약, 만약 약, 반야 야, 勤―수고로울 근, 부지런할 근

    곡신(谷神)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묘(玄妙)한 암컷이라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
    이를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
    면면히 이어져 있는 듯하니,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 뜻풀이 >
    이 장(章)의 제목을 나는 '진리에 이르는 문(門)'이라고 붙여 보았다. 진리에 이르는 문이라……햐! 이런 말만 들어도 내 가슴은 벌써 이렇게도 뛰누나! 문(門)이란,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방이나 혹은 집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반드시 그 문을 통해 어떤 방이나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듯이, 우리가 진리에 이르는 데에도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형상'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길[道]이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장(章)은 바로 그 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 진리에 이르는 문은 분명코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바로 그 문 앞에 서 있다. 삶의 어느 한 순간 문득 그 진리의 문이 열려, 언제나 어느 때나 나누고 분별(分別)하고 구별짓고 간택(揀擇)하던 이제까지의 그 모오든 몸짓들이 멈추고,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이 숨막히도록 역동적인 삶을, 그 어느 것도 거부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온전히 '삶'과 하나 되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아아,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 것도 되지 않아도, 단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가슴 벅차 오르고 행복할 수 있을텐데……!

    자, 그렇다면 이제 그 문을 두드려 보자.
    谷神不死 是謂玄牝(곡신谷神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이라 한다)……'골짜기'와 '암컷'은 노자가 도(道)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썼다. 골짜기는 '텅 비어 있음'을, 암컷은 '여성적 수동성'을 각각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둘 다가 '신비롭고' 또한 '현묘(玄妙)하다'고 한다. 신비롭고 또한 현묘하다……?

    '텅 비어 있음'에 대해서는 도덕경 4장에서 '道沖(도는 텅 비어 있다)'을 얘기할 때, 색즉시공(色卽是空)의 '空'을 언급하면서 설명한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본다. 텅 비어 있음의 신비로움……사실이 그러하다. '나'가 텅 비어 있으면 '삶'이 텅 비게 되고, 동시에 세상과 우주가 텅 비게 된다. 일체 모든 것이 '空'하게 되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 텅 비어 있음은 또한 얼마나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그 텅 비어 있는 세계(世界)와 '나'와 '삶'은 또한 너무도 평범한 것이지만, 그러나 얼마나 신비롭고 오묘한지! 故常無欲以觀其妙!(그러므로 언제나 텅 비어 있으면 그 오묘함을 보게 된다…도덕경 1장) 그리하여 언제나 새롭고, 항상적이며, 끊임없이 샘솟듯 하는 존재의 이 무한한 생명력이여[谷神不死]―!

    그런데 노자는 다시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玄牝)'이라고 말한다. '암컷'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여성적 수동성'을 의미한다. 왜 '암컷'이며, 그리하여 왜 '여성적'인가? 우리가 보통 '남성적'이라고 하면 으레 '적극적', '능동적', '진취적', '힘[力]', '動', '자기 개선의 강한 의지' 등등을 연상하게 되는 반면, '여성적'이라고 하면 '소극적', '수동적', '부드러움', '弱', '靜', '순종적 받아들임' 등등을 떠올리게 된다. 동시에 '남성적'인 여러 속성들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거나, 삶에 있어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람직한 자세들이라고 여기는 반면, '여성성' 혹은 '여성적'인 속성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부시켜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극복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의 노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커녕 삶은 오히려 '여성적'일 때 진정 꽃필 수 있으며, 그때에야 비로소 삶이 지닌 그 모오든 에너지와 생명력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살아낼 수 있게 되어 진정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바로 그때 우리는 '참된 것'이랄까, '영원한 것', 혹은 '진리'라고 말해질 수 있는 무언가를 맛볼 수 있다.) 그렇다. 삶에 있어서의 '여성성' 혹은 '여성적 수동성'은 우리를 진리에로 인도하는 문(門)이다. 그런데 이때, '수동성'이란 '소극성' 혹은 '소극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오히려 '수동성'은 삶에 대한 가장 깊고도 완전한 '적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수동성'이란 뭘까? 무엇을 의미할까?

    '수동성(受動性)'은, 사전적 의미로는, '다른 것으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이는 성질'을 말하며, 이에 반대되는 능동성(能動性)은 '스스로(제 힘으로) 다른 것에 작용하는 성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수동성'은 제 스스로 나서서 무언가를 <변형>시키거나 <개선>하거나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여성적 수동성[玄牝]'이란 다름 아닌 노자가 도덕경을 통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무위(無爲)'를 뜻함이 아닌가!

    벌써 두어 해 전의 일이다. 대구에 계신 어떤 선생님 한 분이 인터넷을 통해 연락이 와서는 한 번 만나고 싶다며 찾아오셨다. 그리곤 대뜸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하면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신지 좀 더 설명을 해달라고 했더니, 자신은 삶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여러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어떤 경우에도 진정 자신답지 않고 무언가 항상 떠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대할 때에도 자신은 진정 교사다운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는지, 또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이것저것 애써보지만 이게 과연 아버지다운 모습인지, 뿐만 아니라 남편으로서, 가장(家長)으로서, 자식으로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역할에 있어서도 자신은 항상 아직 그 무엇에도 닿아있지 않은 듯하고 턱없이 부족한 듯하여 그때마다 늘상 입술이 타는 듯한데, 언제까지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이젠 그야말로 하루 하루가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그분은 '불안'이라고 표현했는데, 단 한 순간만이라도 불안하지 않고 자신답게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애틋한 마음으로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다시는 불안하지 않고 당당하게, 또한 언제나 자신답고 신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은 진정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좋습니다. 진정 불안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싶으시다면, 불안하지 않고 당당한 사람이 되려는 그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으십시오. 그냥 불안하라는 말입니다. 불안을 떨쳐버리고 당당한 사람이 되려는 일체의 노력과 마음들을 정지하고, 그냥 지금 선생님에게 찾아온 그 불안을 사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진실로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면, 다시는 선생님의 삶 속에서 '불안'이라는 것을 목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성적 수동성'으로써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라는 말이다.
    햐! 그런데 어찌 이 말을 믿을 수 있나? 불안을 못 견뎌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 함에 더 나은 방법을 찾고 더욱 더한 열심을 내어도 부족할 판에, 아니, 그 마음을 버리라니! 그냥 불안하라니! 그러면 차라리 죽으라는 말인가? 그렇다. 죽으라는 말이다.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버리라는 말이다.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無爲]! 불안이 오면 불안을 살고 짜증이 오면 짜증을 살며 분노가 오면 그냥 그 분노를 사는 것, 그러한 '지금' '여기'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비교>나 <분별(分別)>로써 간택(揀擇)하지 않고 다만 그대로를 사는 것, 끊임없이 나서서 그러한 것들을 <변형>시키고 <개선>하려는 그 마음의 작용이 정지해 버리는 것, 그리하여 진정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바로 '나'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①

    ① 이 대목에서 꼭 하고 싶은 성경 얘기가 있다. 성경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너무나 유명한 10계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가운데 제1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는, 일반적으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더 잘 기억되고 회자(膾炙)되는, 아아 너무나 많은 오해와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이 말! 성경 자체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말씀 또한 너무나 일방적으로 종교적인 의미로만 이해되고 해석되기를 강요받아 왔다. 그러나 이제 조금 다른 각도로 이 말씀을 들여다보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이 말은 곧 '지금' '여기'에서의 매 순간순간의 삶 이외의 다른 것을 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문득 불안이 밀려오면 그냥 불안할 뿐 그것을 불안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지 말며(불안 이외의 다른 신 ― 곧 당당함이나 여유로움 등 ― 을 섬기지 말며), 문득 짜증이 찾아오면 그 짜증을 살고(짜증 이외의 다른 것을 구하지 말고), 분노가 오면 그냥 분노할 뿐이며 무기력해지면 그냥 무기력할 뿐, 그리하여 오직 매 순간순간의 '현재'를 살라는 말이다. 그 '현재'를 '불완전'이니 '부족'이니 하고 <판단>하거나 <분별>하여 그것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극복하려는, 그리하여 미래의 '완전'을 위하여 '현재'를 저당잡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여기, <분별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것 속에 있지, 미래의 보다 완전하고 완벽한 어떤 모습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계신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불안과 짜증과 분노와 무기력이 곧 하나님이요 진리 ―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요 색(色)이 곧 공(空) ― 이다! 그러니, 매 순간순간의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나 가톨릭에서 말하는, 여호와나 예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작은> 책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나의 그런 말에 몹시 의아해 하며, "아니, 이 불안한 마음을, 언제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안절부절못하는 이 마음을 견딜 수 없어 어떻게 하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정말이지 타는 듯한 마음으로 말씀을 드린 건데, 그냥 불안하라니오? 더구나 불안을 벗어나려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니오!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으라니오! 그럼, 저보고 죽으라는 말입니까?"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그런 말에 무어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 같은 것을 그 선생님은 느끼셨던 모양이다. 그것은 아마 그분 자신이 그동안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자각과 함께 어떤 절망감 같은 것이 내면 깊이 이미 와있었기 때문에 나의 그런 말들이 가슴으로 들려왔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곤 마치 무언가에 한 방 얻어맞은 듯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는데,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말하자면, 끝없는 '갈증'과 '메마름'과 '추구'의 옛 사람은 죽고, 자유롭고 행복하며 진실로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새 사람이 된 것인데, 아아 그분이 대구 도덕경 모임에 나오셔서 들려주고 보여주신 '변화된 삶'의 얘기들은 얼마나 주옥같고 눈부시던지!

    '변화' 이전(以前)에는 하루 하루가 지겹고,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한없이 힘겨웠으며, 더욱이 어느 날엔가는 문득 터럭만큼의 변화도 없는 자신의 매일 매일의 일과(日課) ―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똑같고, 일어나서 용변보고 세수하고 밥먹고 하는 순서와 소요시간이 똑같으며, 출근길이 똑같고, 만나는 아이들이 똑같고, 해야 할 일들이 똑같고, 퇴근시간과 그 이후의 일들마저 똑같은데, 아아 그 똑같은 일들을 내일도, 모레도, 또 그 다음 날에도 계속해야 한다는 ― 를 자각하고는 숨마저 막혀오는 고통으로 괴로워했었는데, '변화' 이후(以後)에는 매일 매일의 삶은 전과 다름없이 똑같건만, 희한하게도 그 똑같은 일상(日常) 속에서 전혀 새롭고도 신명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먹고 출근할 때까지의 시간과 순서와 가는 길은 똑같은데, '이전(以前)'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며, "또 가야 하나……이 긴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야 하나……?"라고 했다면, '이후(以後)'에는 "아,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내가 이렇게 잠을 자고, 이 아침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가! 잠이라는 건 또 얼마나 신비로우며, 이 하루 동안에 또 무슨 일이 내 앞에 펼쳐질까?"라며, 눈뜰 때부터 감동하며 설레는 기대로써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세수하다 말고 문득 대야에 담긴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 이 물! 이 빛깔과 이 차가움과 이 질감(質感)! 이런 것이 여기 이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가?"라며 스스로 전율하는가 하면, 어제와 똑같은 출근길이 그렇게도 새롭고, 마치 처음인 듯 눈부시기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무회의 등에서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당당하고 분명하게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기도 하며 ― 이전에는 끊임없이 다른 선생님들을 의식하며 그렇게도 주눅들고 자신없어 하던 그 시간이었는데! ― 또 어느 날엔가부터는 그렇게도 버겁던 아이들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게만 보여, "아니, 내가 이렇게도 학생들을 사랑했던가……?"라며 스스로 북받쳐 오르는 감동에 젖기도 했단다. 그러니 얼마나 '살 맛'이 나겠는가? 얼마나 하루 하루가 재미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살아있음의 모든 기쁨과 환희가, 그분이 그렇게나 벗어나고 싶어하던 '불안'과의 단 한 번의 진정한 맞닥뜨림으로 인해 가능해진 것이다. 그 한 번의 진정한 맞닥뜨림 혹은 받아들임 ― 이것이 곧 무위(無爲)이며, 또한 '여성적 수동성[玄牝]'이다 ― 이 그렇게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정말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불안'이라는 번뇌가 곧 보리(菩提)이기 때문이다.

    玄牝之門 是謂天地根(현묘한 암컷의 문, 이를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그렇게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될 때[無爲], 그리하여 그 '여성적 수동성[玄牝之門]' 속에서 오직 매 순간 순간의 '현재'만 있게 될 때,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늘 우리와 함께 했으되,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우리의 '마음'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아아 온갖 생명력으로 가득찬 <새로운> 세계가 그때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나'의 안과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긍정됨으로써 비롯되는 엄청난 환희와 평화의 세계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이사야 65:17∼18) 아멘!

    綿綿若存 用之不勤(면면히 이어져 있는 듯 하니,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이때 면면약존(綿綿若存)이라 하면 우리는 대뜸 '아주 오랜 옛적부터'나 '태초'를 연상하게 되지만, 그래서 도(道)라는 것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아니, 도는 그렇게 '시간'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다. 도의 시점(時點)은 언제나 '현재'이다. 그래서 이 면면약존(綿綿若存)을 그렇게 이해하지 말고, 우리의 이 '오늘'의 삶을 생각해 보자.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나아가 꿈속에서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과 느낌들이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오는가! 그런데 그 하나 하나가 분별(分別)하지 않고 간택(揀擇)하지 않는 마음으로 보면 다 보리(菩提)요 도(道)이니, 그러므로 아무리 그것을 써도 피곤치 않고 다함도 없다는 것이다(用之不勤). (이렇게 읽으니 이 문장이 얼마나 우리 가까이 다가오는가!)

    그러니 보라, 그렇게 '한 마음' 내려놓고 살아가게 된 이 '나'와 '삶'은 얼마나 충만한 생명력으로 가득한지!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의, 이 너무나 평범한 일상(日常)들이 얼마나 새롭고 눈부신지! 살아 있음이 얼마나 신비롭고 오묘한지! 배고프면 밥 먹고 자고 싶으면 잠을 자는 이 낱낱의 움직임이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지! 때로 짜증내고 때로 미워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살포시 미소짓기도 하다가 때로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는, 아아 아뜩할 만큼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온갖 감정들로 가득한 이 '나'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대견한지! 뿐만 아니라 저 숨이 컥 막힐 것 같은, 그래서 문득 울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하늘은 또 어떻고! 시시로 때때로 뜰 앞에 내려와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쪼아먹고는 무슨 급한 일이 생각난 듯 후두둑 날아가 버리는 저 이쁜디 이쁜 참새들은 또 어떻고! 저 산은! 저 강은! 저 바람은! 온갖 생명들로 가득한 이 땅은!

    아아, 도(道)가 어디에 있느냐고? 진리(眞理)가 어디에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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