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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현(賢)'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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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14,946회 작성일 06-02-07 08:22

본문

 
3장 ― '현(賢)'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쉬어라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

    尙―높일 상, 숭상할 상, 오히려 상, 賢―어질 현, 使―하여금 사, 부릴 사, 가령 사, 爭―다툴 쟁, 貨―재화 화, 盜―도둑 도, 훔칠 도, 亂―어지러울 란, 腹―배 복, 骨―뼈 골, 敢―감히 감, 也―어조사 야, 則―곧 즉, 법칙 칙

    '현(賢)'을 높이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둑이 되지 않으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히 하며,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고,
    무릇 안다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나서지 못하게 한다.
    무위(無爲)하니, 다스려지지 않는 바가 없구나.

    < 뜻풀이 >
    이 장(章)은 일반적으로 노자가 통치자의 윤리를 밝혀놓은 장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다스리는 자가 어짊(賢)이나 현자(賢者)를 높이고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도 각자 자신만의 존재와 삶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어 다만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 뿐 다투지 않게 되고, 또한 임금이 먼저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겨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백성들도 그 마음을 본받아 스스로 도심(盜心)을 버리게 되며, 다스리는 자가 그 마음을 비워 욕심낼 만한 것을 눈에 띄게 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도 저절로 안정이 되고 질서가 잡혀 어지럽지 않게 된다……" 등으로 푼다. 그래서 치자(治者)가 먼저 모범을 보이고 청렴하면 백성들도 그를 본받아 온 나라가 태평(太平)하게 되니, 모름지기 다스리는 자는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읽어도 맞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만 읽으면 이 장(章)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나' ― 우리 각자 자신 ―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글이 되고, 따라서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의(眞義)를 크게 놓쳐버리고 만다. 경전(經典) ― 이 도덕경(道德經)을 포함하여 성경이나 불경(佛經), 논어(論語) 등등 ― 은 그렇게 읽어서는 안된다. 경전은 전적으로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와 '마음'에 관해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경전에 나오는 어떤 글들도 다 '나'를 두고 한 말이지, 지금 이 순간의 '나'와 직접적이고도 실제적인 관련이 없는 글은 적어도 경전 속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심불반조(心不反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라 하지 않던가? 마음을 돌이켜 자신을 비추어 보지 않으면 경(經)을 읽음이 무익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눈은 책을 향하되 마음으로는 자기 자신을 봐야 한다. 그랬을 때 경전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나'를 밝히는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도덕경도 결국 '마음 밝히는 책'이다.

    나는 이러한 맥락으로 이 3장을 풀고 싶다. 어떻게? 다만 우리 자신 안으로, 우리 내면으로 들어가 이 글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뜻밖에도 이 3장은 우리를 진리(眞理)에로, 자유에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된다. 사실 이 3장이, 특히 맨 처음의 '불상현(不尙賢)'이라는 세 글자가 이후 81장까지의 도덕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核)이다.
    그리하여 이 '불상현(不尙賢)'의 참뜻이 우리 자신과 삶 속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그때 우리에게는 일생일대의 존재의 비약(飛躍)이 와 마침내 우리 영혼에는 쉼이, 우리 삶 속에는 평화가 깃들게 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생(生)의 모든 방황과 메마름과 갈증이 영원히 끝이 나고, 마침내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인가?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므로 이제 이 3장을 읽어나감에 있어 '불상현(不尙賢)'의 참뜻이 곧바로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한 번 읽어보자.

    "不尙賢 使民不爭(현賢을 높이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되고)……"로 시작되는 이 3장을 우리 안으로 가져가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읽었을 때, 그러면 치자(治者)는 '나' ― 우리 각자 자신 ― 가 되고, 백성은 '내 안의 백성'이 된다. 내 안에도 '백성'들이 참 많은 것이다. 이를테면 미움, 짜증, 분노, 게으름, 기쁨, 슬픔, 불안, 교활함, 이기심 등등 이름하여 오욕칠정(五慾七情)이라 불리기도 하고 번뇌(煩惱)라고도 하는 '내 안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이 글을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읽었을 때, 그러면 불상현(不尙賢)의 '현(賢)'은 '나' 밖(外)에 있는 어떤 어진 사람이나 현자(賢者)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내 안의 백성들 가운데 <∼보다 나은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우리의 내면은 언제나 둘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부족하고 못난 자신보다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면에 있어서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고, 남들로부터 비난이나 욕을 듣기보다는 인정과 칭찬을 듣기를 원하며, 게으르기보다는 성실하고 싶고, 무지(無知)보다는 지혜를, 너무나 쉽게 분노하고 짜증내면서 작은 이기(利己)에 매달리는 작디작은 자신보다는 넉넉하고 여유로우며 가슴이 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만큼 미움보다는 사랑을, 회의(懷疑)보다는 확신을, 번뇌(煩惱)보다는 보리(菩提)를, 중생(衆生)보다는 부처[깨달음]를 우리는 내면 깊이 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부족하고 못난 현재의 자신보다는 미래의 보다 더 나은 '나' ― 이것이 내가 말하는 '현(賢)'의 의미이다 ― 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어떤 노력과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또한 마땅히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만이 진정 인생을 참답게 사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노력과 관심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가)         (나)
    게으름 → 성실함
    불안 → 당당함
    무지 → 지혜
    미움 → 사랑
    분노·짜증 → 자비로운 마음
    이기(利己) → 이타(利他)
    부족 → 완전함
    번뇌(煩惱) → 보리(菩提)
    중생(衆生) → 부처[깨달음]
    죄인 → 의인
    지금 여기 → 미래

    그렇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가)보다는 (나)가 더 나아 보인다. 그래서 삶의 매 순간 언제나 (가)보다는 (나)를 더 높이면서, 또한 (나)에 자신의 삶의 많은 의미와 가치와 무게를 부여하면서 (나)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오직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과 삶의 가치를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자기완성에로 나아가 진정한 자유에로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서 말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삶의 방식과 방향은 언제나 '상현(尙賢)'의 형태를 띤다. 그렇지 않은가?
    아아, 그러나 그 일이 마음먹은 대로 그리 잘 되던가? 타는 목마름으로 (나)의 사람이 되기 위해 발을 동동거리며 몸부림쳐 보지만, 그 애틋함 만큼이나 다시 목마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화와 '쉼'이 문득 찾아와 주던가?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결국 채워져 있지 않는 자신의 내면의 갈증과 아픔만을 거듭 거듭 목격하게 되지 않던가? 아아, 그리하여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존재의 이 분열감(分裂感)과 '쉼' 없는 영혼의 갈증이여―!

    그러나, 보라! 불상현(不尙賢)! 여기에 길[道]이 있다! 삶의 깊디깊은 방황과 그 모든 허허로움에 종지부를 찍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상현(不尙賢)! '현(賢)'하려 하지 말라! 이젠 제발 '현(賢)'하고자 하는, 즉 (가)를 버리고 (나)에로 가려고만 하는 그 마음을 쉬어라! 우리는 언제나 그와 같이 '상현(尙賢)'을 통하여 삶의 완성에로 나아가려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현(賢)하고자 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간절하게 그것을 원한다 할지라도 결단코 그 자리에 갈 수가 없다. <현(賢)하려 하는 한> 우리는 결코 현(賢)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는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이 원하는 바 ― 자기완성, 깨달음, 진정한 자유 등. 이름하여 '현(賢)' ― 를 이루어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로 진실로 말하건대, 현(賢)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賢)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不尙賢]! 현(賢)하고자 해서는 결단코 그 자리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내면 깊이 이해하고, (나)를 향해 가던 그 발걸음을 (가)에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 곧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현재'에 머무르는 것이다①. 믿기지 않겠지만, 진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 곧 (가)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①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이다. '회개'란 울고 불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3:2) 라고.

    우리가 그토록 찾고 목말라 하는 참된 자유와 행복, 진정한 자기완성[眞我], 완전한 깨달음이란 저기, '나' 밖(外) 어딘가에, 더구나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다가갈 수 없는 미래의 언젠가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뜻밖에도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이 자리, 우리가 진리와 깨달음과 온전함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나려 하는 바로 그 자리, 그리하여 너무나도 부족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이 '나'와 '현재' 속에 온전하고도 올올이 있다.
    따라서 (진실로 진실로 말하건대) 우리가 진리를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함으로써 진리에 이르려는 그 한 마음만 쉬어라. 그러면 바로 그때 우리에게는 전혀 뜻밖의 존재의 비약과 해방(解放)이 와, '나'를 포함하여 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진리의 자리요, 어느 자리인들 진리 아님이 없음을 알게 된다. 진리는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난 적이 없음을 알게 되어 비로소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작 버려야 할 것은 (가)가 아니라 바로 (나)이다! (나)는 온갖 욕망과 두려움과 '군림(君臨)에의 욕구'가 짜깁기해 만들어놓은 허구(虛構)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마음'이라는 것에 속아왔다. '마음'이라는 놈은 언제나 어느 때나 '나'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항상 상대적인 분별(分別)과 구별 속에서만 그것을 바라보도록 일찍부터 우리를 조건지워 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원효(元曉)에게서 볼 수 있었듯이, '더럽다' '깨끗하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원효의 마음이 지어낸, 원효의 마음 안에서의 분별이요 구별일 뿐 사물에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닌데도, 마치 그것이 <실제>요 <사실>인 양 '마음'이라는 놈은 언제나 우리를 속여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족함'이니 '완전함'이니 하는 것도, '선(善)'이니 '악(惡)'이니 하는 것도, 생(生)과 멸(滅), 번뇌(煩惱)와 보리(菩提), 중생(衆生)과 부처[깨달음]라는 것도, 앞에서 말한 (가)와 (나)의 현격한 구별과 거리라는 것도 사실은 모두가 '마음'이 지어낸, '마음' 안에서의 '환(幻)'일 뿐 '나'와 삶과 세계(世界) 속에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마음'이라는 것에 속아 그 모든 것이 마치 <실제>요 <사실>인 양 하며 끊임없이 (가)를 버리고 (나)에로 나아가려고만 하니, 그 깊디깊은 맹목(盲目)과 미망(迷妄)을 어찌할꼬? 다만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그 한 마음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만 내려지면 그만인 것을!

    (가)에서 (나)로 감으로써 자기완성을 이루려고 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큰 착각이요 허구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성경에도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너무나 유명한 선악과(善惡果)의 비유가 그것인데, 이제 그 절묘한 이야기도 여기에서 한 번 해보자. 창세기 3장 1∼11절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이것은 '태초'에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자신이 본래 가졌던 평화와 기쁨과 자유 등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이야기는 정확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이다.

    맨 첫 구절에 나오는 '뱀'은 우리가 익히 아는, 그 기어다니는 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뱀' 곧 우리의 '생각[思考]'과 '마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이 '생각'과 '마음'은 얼마나 간교한가? 있지도 않는 '환(幻)'과 허구(虛構)를 마치 <실제>요 <사실>인 양 우리를 속이며 끄달려 다니게 하니 말이다. 그렇게 이 '뱀'을 우리 '내면의 뱀'으로 읽었을 때, 선악과의 이 얘기는 대번에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바로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사실,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자주 이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지!

    우선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 놀랍고도 기가 막힌 선악과의 비유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부분 바로 앞에 나오는 창세기 2장16∼1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 것을 당부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3장에서 뱀의 유혹을 받고 있는 하와에게서는 약간 다르게 대답되어 나온다. 즉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와에게서는 어느새 "죽을까 하노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참 미묘한 차이이지만, 그 작은 틈을 비집고 뱀이 유혹해 들어온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그렇듯 우리 '내면의 뱀' 곧 우리의 '생각[思考]'과 '마음'은 빈틈없이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그리고 너무나 그럴듯한 모양으로 우리를 집어삼켜 버린다.
    보라, 뱀이 뭐라고 대답하느냐 하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고! 햐―! 그러니,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가 없는 것이다. 그 너무도 확신에 찬 뱀의 말을 듣고 하와가 문득 선악과를 봤을 때, 선악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로 하와의 눈에 들어온다. 정말 그것을 먹는 날에는 뱀의 말대로 자신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 같이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와는 망설임 없이, 어쩌면 커다란 기대와 설렘마저 갖고서 그것을 따먹는다.

    아아, 그런데 '상현(尙賢)'에의 욕구로 가득 찬 우리 눈에도 앞에서 말한 (가)보다는 (나)쪽이 얼마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가! 그래서 얼마나 (나)를 열망하며 (나)의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가! 뿐만 아니라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말로 유혹했을 때 그들이 망설이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었듯이, 우리도 똑같이 우리 '내면의 뱀'에 속아 "내가 (나)에 이르러 (나)의 사람이 되는 날에는 내 눈이 밝아 마침내 자유하리라……"라며 얼마나 큰 확신을 가지고 (가)를 떠나 (나)에로 가고 있는가! 이 '태초'의 얘기가 얼마나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흡사한가!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던가? 정말 뱀의 말처럼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존재의 비약(飛躍)이 왔던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눈에 비친 것과는 정반대의 삶이 갑자기 그들 앞에 펼쳐져 버렸다!
    보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맨처음 보인 반응은 자신들의 벗었음을 알고 부끄러워하며, 두려워하고,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엮어 자신들을 가리고, 또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다. 오, 이런! 갑자기 인간은 당당해지기는커녕 너무나 초라하고 궁색해져 버렸다! 이는 뱀의 유혹을 받기 전인 창세기 2장 마지막 절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2:25)라고 하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것은 정확히 (가)를 떠나 (나)에로 가려고 하는 동안의 우리 자신의 모습들이 아닌가! 우리도 끊임없이 (가)쪽에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그런 자신이 남들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하며 숨고, 또한 온갖 그럴싸한 것들로 자신을 가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무엇보다도, 하와의 눈이 하와를 바르게 인도했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쪽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럽게' 보아 끊임없이 (가)를 버리고 (나)에로 가려는 우리들의 맹목적인 믿음과 노력이 과연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고 마침내 우리를 자유케 할까? 노우(No),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태초'의 그 어리석음을 '지금'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 기가 막힌 성경 구절이 하나 있다. 뭐냐면,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자, 아담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는데, 그 말을 듣고 다시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기가 막히도록 절묘하다. 즉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Who told you that you were naked)?"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네가 벗은 줄을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해야 할텐데, 성경에는 이상하게도 '누가(Who)'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누가(Who)……!" 그런데 이 '누가'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뱀'이 아닌가! 바로 우리 내면의 뱀!

    보라, 창세기 2장25절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라고 했던 것처럼,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벌거벗고 있었고, 따먹은 후에도 벌거벗고 있었다. '벌거벗었다'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도, 뱀이 불어넣은 한 '생각'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이 들어오니 조금 전까지 편안하던 그들의 '벌거벗었음'이 대번에 부끄럽고 두려우며 숨기고픈 무엇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벌거벗었음'이 잘못되었는가, 아니면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만든 그 '생각'이 잘못되었는가? 만약에 '벌거벗었다'라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그들은 이미 처음부터 부끄러워해야 했을 것이다.
    이때 '벌거벗었다'라는 것은 어떤 가식이나 거짓, 왜곡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모습 ― 곧 (가)에 있는 ― 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것을 부끄럽고 두려워하며 숨기고픈 무엇으로 보이게끔 한 것은 바로 그 '생각'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에게 잘못된 것은 오직 하나, 바로 그 '생각'이건만, 오히려 우리는 그 '생각'에 속아 그 '생각'이 가리키는 대로 끊임없이 (가)를 버리고 (나)로만 가려고만 하니, 이 무슨 안타까운 아이러니인가! 그러므로 오직 그 한 '생각'만 내려지면―!

    불상현(不尙賢)! 현(賢)하려 하지 말라! 그리하여 만약 현(賢)하고자 하는 마음의 어리석음을 진실로 깨닫고,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보잘것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면, 그때에도 여전히 '부족함'이라든가 '불완전' 혹은 '보잘것없음'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 '나'를 괴롭힐까? '나'는 여전히 그런 존재일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커녕 전혀 뜻밖에도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는 일생일대의 존재의 비약(飛躍)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그토록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던 그 모든 구속과 마음의 짐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예를 들어, 여기 '빨간색'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빨간색이 빨간색일 수 있는 것은 빨간색이 아닌 다른 색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만약 빨간색만 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빨간색'이라고 인식할 수 없으며, 나아가 '색'이라는 개념 자체도 성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진실로 진실로 우리의 내면에서 '현(賢)'하고자 하는 마음의 작용이 정지한다면, 그리하여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보잘것없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자신만 남게 된다면, 아아 그때는 알게 되리라, '나'는 이미 완전하며, 이미 현(賢)하며, 이미 이대로가 부처[깨달음]라는 것을!② 그리하여 마침내 다시 목마르지 않는 영혼의 '쉼'은 찾아오고―!

    ② 그러나 위에서 든 예에서처럼, 빨간색만 있을 경우 '색'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듯이, 사실은 이때는 '완전'이니 '현(賢)'이니, '부처[깨달음]'니 하는 것들도 없다. 다만 이름하여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불상현(不尙賢)! 그리하여 진실로 현(賢)하려 하지 않게 되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를 괴롭히던 내면의 모든 자기분열(自己分裂)은 끝이 난다. 드디어 내 안의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되는 것이다[使民不爭]. 이 이후에 나오는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니, 不見可欲 使民心不亂이니 하는 것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결국은 '마음'의 문제이지, 탐하는 '마음'이 없다면 '귀한 재물'이니 '욕심낼 만한 것'이니 하는 것들도 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언제나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며[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언제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혜안(慧眼)을 열어주어 자족(自足)할 줄 알게 하며,

    '현(賢)'하고자 하고 또한 '현(賢)'해야만 자신의 삶이 의미있고 가치있을 것 같아 애타하던 그 모든 몸짓들이 사실은 한바탕 꿈이었음을 눈뜨게 하여[弱其志],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삶,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지금 여기에서의 하루 하루의 현실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게 하며[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그렇듯 성인의 가르침은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쌓고 노력함으로써 ― 현(賢)하려 함으로써 ― 비롯되는 지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올바로 앎으로써 비롯되는 그 무한한 지혜에 눈뜨게 하여, 다시 의문(疑問)하지 않으며[自證], 다시 목마르지 않으며[自存], 스스로 알며[自明], 스스로 그러한[自然] 삶을 살게 한다.
    아아, 모두가 알지니, '현(賢)'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다스려지지 않는 바가 없는 이 도리를[爲無爲則無不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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