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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 원효(元曉)와 해골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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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17,572회 작성일 06-02-07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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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 원효(元曉)와 해골바가지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皆―다 개, 모두 개, 斯―이 사, 어조사 사, 惡―추할 오, 미워할 오, 나쁠 악, 已―뿐 이, 이미 이, 그칠 이, 難―어려울 난, 易―쉬울 이, 바꿀 역, 形―형상 형, 나타날 형, 傾―기울어질 경, 隨―따를 수, 處―머무를 처, 곳 처, 焉―어조사 언, 어찌 언, 辭―사양할 사, 말 사, 恃―믿을 시, 의뢰할 시, 夫―대저(발어사) 부, 남편 부, 唯―오직 유, 去―갈 거, 버릴 거, 과거 거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알지만, 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선(善)을 선이라고 알지만, 이는 선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다(有)' 하기에 '없다(無)'는 것이 있게 되고, '어려움(難)'이라는 것에 마음의 무게를 두기에 '쉬움(易)'이라는 것에도 집착하게 된다. 그렇듯, 길고 짧음도 결국은 마음의 산물이며, 높고 낮음, 음(音)과 성(聲), 앞과 뒤라는 것도 그 각각의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하고 분별하는 우리의 마음이 지어낸 허상(虛像)일 뿐이다.
    그렇기에 성인은 언제나 분별(分別)하고 간택(揀擇)함이 없는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여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고,
    만물(萬物)을 짓되 그 어느 것도 사양하지 않으며,
    낳되 소유하지 않고,
    하되 '했다'는 의식이 없으며,
    공(功)을 이루되 거기에 거(居)하지 않는다.
    대저 오직 거하지 않기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 뜻풀이 >
    도덕경 1장이 도(道)에 대한 일종의 '선포(宣布)의 장(章)'이었다면, 2장은 우리들의 기존의 신념과 가치관 혹은 지식과 경험들을 한 번 뒤흔들어 놓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2장의 시작부터가 그렇듯이, "우리가 아름답다고 아는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것일까? 우리가 아는 선(善)이 정말 선일까?"라는, 상당히 도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물음들을 우리에게 던지면서 노자(老子)는 얘기를 시작하고 있는데, 나는 이 2장의 뜻풀이를 원효(元曉) 대사의 너무나 유명한 '해골바가지'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어쩌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 노자가 이 장에서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眞義)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며, 나아가 삶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지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효(元曉, 607∼686)는 그의 나이 45세 때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불법(佛法)을 구하러 당(唐)나라로 간다. 그런데 이는 그의 나이 34세 때 역시 의상과 함께 당의 현장(玄장)에게 유식학(唯識學)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돌아온 뒤의 두 번째 길로, 이번에는 해로(海路)로 가기 위해 백제땅의 어느 항구로 가던 도중이었다.
    이미 밤은 깊어 칠흑같이 어두운데, 갑자기 큰 비마저 내려 원효와 의상은 어떻게든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어둠 속에서 오래된 토감(土龕)①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여 손을 더듬으며 두 사람은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오랜 동안의 여행길에 지친 원효는 곧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만다. 새벽녘 잠결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원효는 본능적으로 어둠 속을 더듬었고, 문득 손에 잡힌 바가지의 물을 단숨에 들이킨다. 아아, 얼마나 시원하던지! 몇 날 며칠 얼마나 힘든 길이었는데, 그 모든 피로와 허기와 갈증을 이렇게 한꺼번에 씻어주니, 세상에 이보다 더한 감로수(甘露水)가 또 어디 있겠는가! 원효는 행복감에 젖어 다시 잠이 들었다.

    ① 흙으로 지은 사당 안의, 신주(神主)를 모셔두는 장(欌).

    아침이 되어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날이 밝았을 때, 원효는 눈을 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방금까지 토감(土龕)이라 생각하고 누워있던 자리 여기 저기에 사람의 뼈 같은 것이 굴러다니고, 음습하기가 그지없지 않은가? 순간, 원효는 소름이 쫙 끼치는 공포를 느끼며 급히 주위를 둘러본다. 오호라, 여긴 토감이 아니라 너무나 오래 되어 움푹 패인 무덤이 아닌가! 캄캄한 어둠과 피로 속에서 원효는 착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때 물기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해골바가지 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그것을 보는 순간 어젯밤에 자신이 그토록 시원하게 마신 물이 사실은 해골바가지의 썩은 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는 견딜 수 없는 구토와 고통으로 데굴데굴 구르게 되고, 그렇게 데굴데굴 구르던 그 어느 한 순간 문득 원효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친다.

    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我不入唐

    마음이 일어나니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감실(龕室)과 무덤이 둘 아니구나!
    또한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며,
    만법(萬法)이 오직 식(識)이로다!
    마음 밖(外)에 법 없으니
    어찌 따로이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로 들어가지 않겠노라!

    이후 원효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의상과 헤어져 신라로 되돌아온 그는 그야말로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귀족적이며 단아(端雅)하던 그가 갑자기 대중(大衆) 속으로 들어가 무애(無碍)박을 두드리며,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生死)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음주와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佛法)을 전하는가 하면, 요석 공주와 동침해 설총(薛聰)을 낳기도 하고, 이전에는 제대로 된 글 한 줄 쓰지 못하던 그가 2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종횡무진(縱橫無盡)의 대자유한 삶이 물씬 느껴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해골바가지 사건' 때 있었기에 그의 삶이 그토록이나 달라진 것일까?

    우선 해골바가지의 썩은 물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두고 보인 원효의 반응을 보자. 그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는데, 하나는 너무나 시원하게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마치 그것이 하늘에서 내린 감로수인 양 지극히 행복해 하는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그 '동일한 대상'을 두고 이번에는 마치 독약이라도 마신 듯 견딜 수 없는 구토와 고통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원효가 그렇게 마치 하늘에서 내린 감로수를 마신 듯 편안하고 행복해 할 때에도 해골바가지의 물은 여전히 해골바가지의 물이었고, 반대로 못마실 것을 마신 양 하며 견딜 수 없는 구토와 고통으로 데굴데굴 구를 때에도 해골바가지의 물은 여전히 해골바가지의 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해골바가지의 물'이라는 사물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도, 원효는 그 '동일한 대상'에 대해 전혀 다른 상반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원효의 그 '상반된 반응'의 원인은 해골바가지의 물 자체에 있었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 이를테면 원효의 마음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에 있었는가? 그것은 분명 원효 자신의 마음에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원효가 전날 밤 그 물을 마시면서 분명히 그것이 깨끗한 물임을 확인하고 마신 것은 아니지만, 평소의 습관대로 그것은 '깨끗한' 물이라는 무의식적인 분별이 내면 깊이 깔려 있었기에 '해골바가지의 썩은 물'을 마시면서도 편안할 수가 있었고, 반면에 바로 다음 순간 그것을 보며 '더럽다'고 분별하니 그 동일한 대상이 이번엔 견딜 수 없는 구토와 고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즉, '깨끗하다' 혹은 '더럽다'라는 것은 결코 해골바가지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원효의 마음이 지어낸, 원효의 마음 안에서의 분별(分別)일 뿐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원효는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눈에 들어온 해골바가지의 물 그 자체가 실제로 더럽다고 느끼고는 견딜 수 없는 구토를 일으키다가, 그 어느 한 순간 문득, 바로 그 물을 지난 밤에는 그토록 시원하게 마시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에 미쳐서는, 모든 것이 다만 마음이 지어내는 구별이요 분별(分別)일 뿐 ― 心生故種種法生 ―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곤 마음이 짓는 그 모든 허구적인 분별과 무게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서 마침내 자유하게 되었고, 그 자유가 그의 삶을 그토록 근본에서부터 뒤바꿔 놓았던 것이다.

    노자가 이 장(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모든 상대적인 분별(分別)과 그에 대한 간택(揀擇)의 무게는 결국 우리 마음이 지어낸, 우리 마음 안에서의 허상(虛像)일 뿐이지 결코 사물에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②. 그래서 이를테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알지만,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사실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우리 마음 안에서의 분별이요 개념(槪念)일 뿐이지 사물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예를 들어, 봄에 화사하니 목련꽃이 필 때 우리는 그것을 보며 '아름답다'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지만, 곧 그것이 힘없이 툭! 하고 져버리면 그 허망히 떨어져 누운 꽃잎을 보면서는 '추하다'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마찬가지로, 목련꽃은 그냥 피었다가 그냥 질 뿐인 것을 우리가 '아름답다' 하기도 하고 또한 '추하다' 할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美)'­'추(醜)'라는 것도 사실은 다만 우리 마음 안에서의 분별(分別)일 뿐이지, 사물에 실재(實在)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② 이것이 원효가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선(善)'­'악(惡)'이라는 것도 마찬가지[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이 점에 대해선 노자가 도덕경의 뒷부분에서도 '복(福)'­ '화(禍)'와 더불어 그 실체(實體)가 없음에 대하여 여러 번 언급하고 있지만(20장, 29장, 36장, 41장, 45장, 58장 등), 사실 우리는 무엇을 두고 '선(善)'이라 하며 무엇을 '악(惡)'이라 할 건가? 살다 보면 분명히 우리에게 선(善)이요 복(福)이었던 것이 더 큰 고통과 질곡(桎梏)과 불행을 가져다 준 것이 한 두 번이던가?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재앙(禍)과 불행과 악으로만 여겨지던 바로 그것 때문에 전혀 다른 차원의 영적(靈的)인 비약(飛躍)이 와 뜻밖에도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진정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지 않던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선(善)이며 악(惡)이던가? 도대체 그 경계선이라는 것이 있던가?
    그렇다고 나의 이러한 언급이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이란 보다 <입체적인> 무엇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평면적이고도 경직된 '마음' ― '마음'은 언제나 평면적이며 또한 이분법적이다 ― 이 투영한 선·악이라는 기준과 안경으로써 세상과 삶을 바라본다면, 그 무게만큼 삶의 전체성(全體性)은 사라지고 세계(世界) 또한 그렇게 나뉘어져 보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눈에 바라보이는 것처럼 세계는 그렇게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있음(有)'과 '없음(無)', '어려움(難)'과 '쉬움(易)', '길고 짧음(長短)' 등은 우리네 삶과 경험 속에서 분명히 <사실>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있음'에 <집착>한 만큼 그것의 상실인 '없음'이 더욱 우리를 아프게 하고 절망케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만약에 '있음'에 대한 <집착>의 무게가 제로(zero)라면 그 '없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큰 상실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마찬가지로, '삶'이라는 것에 크게 <집착>한 만큼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만약에 그러한 <집착> 없이 다만 주어진 삶을 하루 하루 감사하며 사랑하며 산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현격하게 자리하고 있을까? 그는 때가 되면 선연히 그 삶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실 그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죽음'이란 없다.

    이는 결국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그렇지 않은가? 따라서 만약에 우리가 <사실>에 대한 그 모든 분별(分別)과, 경중(輕重)의 구별과 집착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이 지어내는 '환(幻)'임을 깨달아 마음이 만들어내는 그 모든 허상(虛像)들에 더 이상 끄달리지 않게 된다면, 有­無, 難­易, 長­短, 高­下, 音­聲, 前­後의 모든 삶의 상황들 속에서도 아무런 걸림 없이 자유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일체를 분별(分別)하면서도 그 분별에 매이거나 물들지 않는 진정 무애(無碍)한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아아, 이제 더 이상 그를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是以聖人處無爲之事(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하여)……이때 노자가 말하는 '성인(聖人)'이란, 우리들의 일반적인 이해처럼 '지덕(智德)이 뛰어나 세인(世人)의 모범으로서 숭상받을 만한 사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는커녕 깨달음을 얻기 전의 원효와 같이 자신의 마음의 투영으로서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분별심(分別心)이 내려지고 모든 것을 다만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눈이 열린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은 세인의 숭상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너무나 평범하여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이러한 사람은 무위(無爲)의 일 곧 간택(揀擇)함이 없는 ― 心滅故龕墳不二 ― 자리에서,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고(行不言之敎)……여기에서도 우리는 '불언(不言)'의 참된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불언(不言)'이란 단순히 '말이 없는 침묵'을 뜻하진 않는다.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분별심(分別心)을 내려놓지 못하고, 아직 그러한 사고(思考)와 지식 속에 있는 사람이 말 없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며, 그 한 마음이 내려지고 모든 것을 다만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혜안(慧眼)이 열린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은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불언(不言)'이란 단순히 말을 많이 하거나 하지 않거나에 있지 않다. 이 2장에서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를 말한 노자가 81장까지 5천여자(字)의 도덕경(道德經)을 쓴 것이나, 석가모니가 금강경(金剛經)을 설(說)한 말미에 자신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는 것 등은 다 진정한 의미의 '불언(不言)'을 웅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萬物作焉而不辭(만물을 짓되 그 어느 것도 사양하지 않으며)……다시 말하면, 성인(聖人)은 온갖 사물을 온갖 모양으로 분별하되[萬物作焉], 그 어느 것에도 끄달리거나 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를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의 혜능(慧能) 대사의 말을 빌려 설명하면,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라, 온갖 분별[六塵]을 떠나 있지도 않으며 거기에 물들지도 않아 그것들이 오고 감에 자유하다는 뜻이다.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그렇게 '마음'이 비워진 사람은 마치 거울과도 같아서, 온갖 생각과 감정과 느낌과 행위의,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日常)의 하루 하루를 남들과 똑같이 살면서도, 거울이 온갖 사물을 다 비추면서도 다만 비추기만 할 뿐 소유하려 하지 않듯이, 다만 그냥 그렇게 살 뿐 그 어느 것 하나 자기 것으로 가지려 하거나, 거기에 기대거나, 뭔가 훌륭한 일을 했다고 해서 거기에 거(居)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매 순간 순간 속에 존재할 뿐이다. 아아, 그 머무르지 않음이여―![夫唯不居 是以不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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