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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산청모임후기(진실과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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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름가지 (183.♡.203.138) 댓글 4건 조회 7,126회 작성일 18-08-1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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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 오늘 은정씨 가족을 메인 사진으로 올려봅니다~. 너무 부담가지는 않을려나?!, 그래도 제가 안솔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수제맥주를 사주었고, 또 벌컥벌컥 들이켰으니 어느정도 불만을 잠재울 수 있지는 않을까ㅋ, 남편과 아이 둘, 큰딸은 미스코리아감이네요^^, 막내는 애교쟁이~~. 오늘 선생님께서 엄청 반가워하셨어요. 그 개인의 깊숙한 상처를 알고 또 자기자신과의 내적인 만남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그것을 치루는 과정중의 이야기들, 그 성장의 이야기들 틈틈이 들어온 가족에 대한 언급들, 그렇게 간접적으로 겪어온 가족들을 오늘 실제로 만나게 되었으니 그 기쁨과 감사함이 선생님께는 더욱 특별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이런 가정을 한번 해볼 수 있습니다. 깜깜한 밤, 별도 달도 없고, 전기도 없는, 불빛이 하나도 없는, 이런 상황이라면 우선 마음이 긴장되고, 늘 자유롭게 다니던 이 공간도 깜깜해 전혀 보이지 않게되고, 그래서 두려워지고 누군가는 그 두려움에 고함을 치기도 하고, 공포분위기가 형성될 텐데, 그 순간, 누군가 작은 촛불을 켜면, 어찌할지 모르던 그 마음이 일순간 사라지면서 차분해지고, 그래도 아직 불빛이 작아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점차 촛불이 밝아지면서 지금처럼 환해지면 그땐 아무런 걸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저녁을 먹고 어둠이 질 때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갔는데, 걸어가는 길 어느지점 깜깜한 곳에서 이상한 물체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그 설핏 본 것에서 혹 귀신이 아닐까하는 두려운 생각이 드는, 그것을 자세히 보고 정확히 보기만하면, 그냥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그냥 조금 허탈해하고 어이없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이처럼 자세히 보고, 바른 안목을 가지게 되면, 자기가 자신에 대해 어두울 때 뭔가 불안하고, 헛헛한, 채워지지 않는, 자기 안의 상처들,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두렵고 편안하지 않는, 살아가면서 느닷없이 다가오는 상실, 아픔, 내 안에 밝음이 있다면 외부에서 오는 것을 환하게 볼 수 있게 되기에, 외부로부터 오는 것에 끄달리지 않게 되는, 그래서 외부에서 어떤 것이 오든 바른 처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진실에 대해, 진실에 눈떠 있으면, 삶의 어떤 변화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몰되지 않고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삶이라는 진실에 대해 눈뜨게 되면, 허둥거리던 몸짓이 차분해질 것이고, 자기 호흡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외부의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진실은 항상 밝게 드러나 있습니다. 진리가 지금 여기 없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지금 여기 없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어둡기 때문에 허둥대고 불안하고 여기가 아닌 다른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 진리는 이미 다 드러나 있는데 우리가 어둡습니다. 단지 여기에 내 눈만 밝으면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이 삶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있으나 내가 밝지 못해서 찾게 되는 진실, 사실 진실은 참 단순하고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너무 평범한 것인데, 그래서 참 소중한 것입니다


●'나는 태어났다, 이 몸이 나다, 삶이란 시간의 연속선상에 있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세계란 나와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나는 깨닫지 못했다(나는 구속되어 있다)'이 문장들은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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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참 많은 음식들이 준비되었습니다. 복숭아, 수박, 비빔밥, 과자, 빵, 커피....정성과 시간을 들여 만들고 준비한 음식들.....예수님이 집회를 할때 몇 광주리 안 되는 음식으로 수많은 대중을 먹이고도 음식이 남는 기적을 행했다고 하는데, 그 기적은 바로 개개인이 준비한 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기에 일어난 기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 마음, 다른 이를 생각하고 나누는 마음이 기적이 아닐지~~




●너무나 당연해서 의심해보거나 탐구해 보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데, 너무 당연해 보이니까 그것을 진실로 착각하는데,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이것을 탐구해보면 그 당연해 보이는 것이 금이 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금이 가는 것은 사실 진실이 아니고, 환상이고 하나의 고정관념이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착각에 속아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생각과 기억의 산물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과거에 바탕을 두고 있고, 생각과 기억이 없다면 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에 빠지고 생각과 동일시되면 저말 그렇다고 착각해 버립니다 과거와 미래는 생각과 기억속에 존재합니다. 실재하는 것은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과 생각으로 인해 고착화된 '나', 그것이 없다면 나는 무엇인가?, 실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수평이 아니라 수직입니다. 인생은 수평의 시간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이순간밖에 없습니다. 기억의 무게가 없다면 그것에 끄달리지 않는데, 그것에 무게가 있으면 과거가 마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생각으로 이루어진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실재하는 것으로 믿어 버립니다.


●'나와는 별개로 세계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하나라는 자각이 내 안에서 일어나면, 분리되어 있다고 착각하기에 불안해하는데, 모두가 하나라는 앎이 있다면 분리되었다는 착각에서 오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여기 진리가 모두 펼쳐져 있는데, 내가 어둡기에 알지 못합니다. 진실은 내 자신이 밝아지면, 내가 살아가면서 생긴 고착화된 고정관념, 과거로부터 경험되어지면서 생겨난 어떤 고착화된 것, 그것은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만 사라지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나는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습니까?, 하나의 생명, 존재가 태어난 것입니다. 갓난아이는 자기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분리감이 없습니다. '나'라는 개념이 없기에 분리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이런 환경, 남자 혹은 여자, 이런 생김새로 태어나고 싶었습니까? 만약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절대로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이해할 수 없이 태어났고, 그 이후로 부모가 키우면서 이름을 부르니까 그 이름과 동일시 되고,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태어나 보니 부모가 살갑게 대해주고 뭔가 이름을 부르니 그 이름과 자신을 동일시 합니다. 그때도 아직 '나'라는 것은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직 나가 없고 그냥 '누구'배고파, '누구'아파하는, 자신을 삼인칭으로 부릅니다. 그때도 '나'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분리가 없기에 늘 평화롭습니다. 자유롭습니다. 그냥 이유없이 행복하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개념은 한참 뒤에 생겨납니다. 이 몸이 나라는 생각도 없는데, 너는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다는, 생일이 언제라는 말을 자꾸 듣게 됩니다. 저는 가난했고, 늘 수제비만 먹다가 어느날 소고기국에 흰쌀밥이 나와 먹는데, 제 생일이라고 말해줍니다. 자꾸 그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이 몸이 나다는 동일시가 생겨납니다. 그러니 나와 세계의 분리는 사실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밖으로부터 들어온 입력된 것입니다. 원래는 분리되어 있지 않는데, 오랫동안 습관화된 고정관념, 착각으로 상실과 상처가 생기게 됩니다. 두려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나'가 생기면서 이것이 점점 더 강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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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신체에 감각기관이 있고 그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그런데 그 감각기관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을 없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거꾸로, 이 감각기관이 감지하는 것을 진실로 있다고,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본 것이 확고한 실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하는,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했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실체가 아닌 하나의 감각적 이미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내가 안다라고 할 때, 그저 그 대상에 대해 감각적 이미지만을 안다는 것이지 그 명확한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식된 이미지 너머의 확고한 실체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몸이 태어나고, 뒤에 '나'라는 개념이 따라 붙는데, 내가 생각하는 '나', 이게 가짜 나이고, 진짜 나를 '진아'라고 부르는데, 대부분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진짜 나가 아니고, 분리되기 이전, 분리가 오기 이전, 그냥 존재하는, 그 진짜 나는 형태가 없습니다. '나'라는 개념이 없더라도, 이 육체도 또한 피부의 안과 밖의 구분이 있습니다. 저는 삶이 괴로워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고통이 질리도록 반복되었기에 그랬습니다. 무엇을 해도 괴롭고, 어떤 순간에도 쉼이 없었는데, 그 결핍이 저를 진리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찾게 되면 이 삶 전체가 감사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감사가 되고, 이런 측면에서 삶은 어떻다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습니다.


●분리된 존재라고 여기기에 삶이 두려운, 어떤 일이 내게 닥칠지 모르기에 두렵게 되는데, 진실을 볼 수 있는 눈리 열리면, 감사가 솟아오르고, 인생 자체가 축복이 됩니다. 사실 '나'는 태어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나중에 생긴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나'가 생기면서 결국 이 '나'가 죽게 됩니다. 탄생과 죽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하나의 형벌같은, 무얼해도 결국 죽게 되기에 허무주의에 빠지게도 되는데, 이게 사실 모두 환상입니다. 삶의 진실은, 진짜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근본적인 불안, 불만족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을 통해 얻게 되는 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그리움을 지니게 되는가? 내가 형태를 지니지 않는 그 무엇인데, 그게 이 육체와 동일시되면서 자기를 잃어버리기에, 자기의 본래 모습을 그리워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능적으로 불만족을 느끼고 밖의 것에서 찾는데, 그것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삶이 고통스럽고 그래서 몸부림치는데, 사실 이게 자기가 선택한 삶입니다. 그 고통을 통해 자기 본래의 진실, 자기 본래의 모습을 찾기위해 이런 결핍의 환경을 택한 것입니다.


●'나'가 생기면서 분리가 옵니다. 전체가 부분으로 분리가 됩니다. 이 육체를 나로 착각하면서 분리가 오고, 또 누구나 이런 바탕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거짓이 진짜가 됩니다. 몸과의 동일시가 되고, 사춘기가 되면서, 또다른 몸과의 동일시에 바탕을 둔 분리가 옵니다. 내 코가 너무 작아, 코가 너무 맘에 들지 않아, 턱이 이래서 맘에 들지않아하는 자기 몸과의 분리, 이 과정 전체가 꿈입니다. 이 신체적인 것, 아주 어릴 때 처음으로 거울을 보는 순간 '이게 나인가'하는 그래서 너무 놀라는 경험을 한 분이 있습니다. 낯설고, 이런 모습의 나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충격, 그러면서 심한 열등감으로 살아가게 되는, 또 마음과 분리가 옵니다. 난 너무 게을러하는, 이런 분리들, 이런 전체가 분리로 인해 점점 작아지면서 남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힘들어지는, 이런 지극히 작은 상태에서도 사실 여전히 진실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게 실체가 아니기에 한순간 이 환상이 깨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깨달음은 한순간에 올 수 있고, 이 착각을 알기만하면 그 한순간에 깨어나게 됩니다.


●어떤 망상이 일어납니다. 꿈을 꾸면, 저는 늘 도망다니고, 귀신이 따라오고, 숨으면 숨어있는 나를 짐승이 달려들어 뭅니다. 그러다 깨면 모든 것이 한순간 사라지지만, 사실 꿈을 꿀때는 확고한 진실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에 함몰되면 그 생각이 진짜가 됩니다. 삶은 오직 지금 이순간밖에 없는데, 그래서 이순간이 과거에 물들지 않으면, 여기에는 나라는 것도 없고 그냥 존재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를 생각과 기억이 과거에서 지금 그리고 미래에 이럴거야 하는 실재하는 것으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깨달으면, 지금 밖에 보이는 산이 어제의 산이 아니게 됩니다. 분리감이 오고 그래서 시간에 연속성을 부여하는데, 그게 없으면 무엇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세계는 나와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고착화된 개념과 관념이 없다면, 그것이 환상이고 착각이라는 깨달음이 오면, '나는 세상과 독립된 개체로 존재한다.'는 착각과 그 착각에서 비롯되는 모든 고통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나'는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해가 되고, 이 바탕에서, '내가 없다, 이 몸이 내가 아니다'는 것, '내가 있다'는 생각 하나가 모든 경계를 만들어 버리는데, 이게 조건화된 것인데, '내가 없다'는 가정하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러면 눈에 보이는 여러분과 이 몸(나, 김기태)의 차이, 하늘과 이 몸의 차이, 개미와 이 몸의 차이, 땅에 떨어져 죽은 매미와 그것을 발로 차는 이 몸의 차이가 없게 됩니다. 밖에서나는 소리를 내가 듣는데, 좀더 자세히 보면 안과 밖이 없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과 내가 걸어가는 것이 하나의 영상처럼 그냥 흘러 가는데, 참 묘한 어떤 느낌들을 받습니다. 우리는 너무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 공감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믿을 수 있다면, 이 소리가 가슴으로 내려와 진짜 그런가하며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의심해보고,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나'라는 것이 이 육체가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 우리는 이 몸을 하나의 전체로 절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모호한 이 몸을, 분명한 무엇으로 이미지화하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데,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바라보면, 그 관심과 호기심이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 절대 깨질 것 같지 않은 허구에 금이 가게 됩니다. 고정관념이 형성되기 이전이 감각되고 느껴지게 됩니다. 그 의심이 더 몰입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그 진실을 점점 더 감각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습관이 사람을 만듭니다. '나와 남'이 실체가 아니라 조건화된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그래서 이 착각에 금이 가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그 낯선것에 관심을 두게 되면, 이 습관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 습관이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다시 예전의 습관으로 때로 돌아가게 되겠지만, 그래도 자꾸 진실 쪽으로 향하게 되면서 친숙했던 것에서 멀어지고 낯선 것이 친숙해지는, 이게 점점 힘을 얻게 되고, 그래서 진실이 100이되면, 삶은 여전히 같지만, 전체로서 부분을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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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미워지고 그것때문에 힘들었었는데요, 지난 몇달간 그 미움속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미움은 진행중이고요, 그러면서 내가 누군가 미워할 자격이 되나하는 생각도 들고, 그 미움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식은땀을 한바가지 흘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생각과 느낌들이 한바탕 몰려가고, 또한편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상대를 존중하고 있다는 생각, 좀 어이없기도 했지만, '존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미움을 그대로 허용하고 그대로 '존중'하는 것, 그것이 또한편 그 자체로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이 미움이라는 감정으로 진실하게 대하기에 존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를 속이거나 거짓으로 대하지 않고 미움이라는 진실한 감정으로 상대를 대하고,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 상대도 자신을 더 돌아볼 것이고, 그것이 자기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리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그것으로부터 확장된 모든 것이 꿈인데, 이 진실에 눈뜨게 되면,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는, 그 형용할 수 없는 진실, 그것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이 삶 이대로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근원이 드러난 것입니다. 진리를 모른다고 착각하는데, 진리는 알고 모르고의 차원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진리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실제 삶을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자근 불빛하나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게 되고, 그 불빛이 점점 커지고 꽉 차게되면 진실한 삶, 모든 것이 환히 밝게 되고, 그 진실위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조금만 의심해보는, 이제까지 믿었던 신념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진실이 점차 드러나고, 그래서 태어나고 죽는 이게없는 진실, 그 진실을 보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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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시간. 질의응답시간은 강의가 끝나고 점심을 먹고 2시~5시까지 진행됩니다. 궁금한 것을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과거', 사실 내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생각이 나라는 믿음이 강합니다. 생각과의 동일시가 너무 깊습니다. 그런 생각의 입장에서 살아왔고 그래서 과거에 그렇게 살았지 않았냐고 질문하는 것인데, 실재는 현재뿐이고, 생각과 동일시되면 그 생각으로 드러난 과거가 사실이 됩니다. 과거의 특정의 기억, 좀전에 아기가 비빔밥을 먹은 것은 그냥 흘려 보내는데, 특정한 상처나 결핍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데, 특정한 기억에 대해선 저항하고 한탄하면서 고통이 창조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진짜로 여기고 거기에서 고통이 촉발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지금 이순간으로 돌아오면, 나와 남으로 분리된 고정관념도 사라지고,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세계가 보입니다. 부분으로서의 삶이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살아갑니다. '나'의 자의식이 옅어지면, 실제 삶에서 나와 남의 구분이 옅어지고 편안해지고, 나라고 할 것이 없는, 분리되기 이전의 것만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나의 현실이 되면 사뭇 달라집니다. 삶이 힘들다가 어느순간 편안해지고, 호흡이 편안해지는, 그래서 평화롭게 살아가게 되면, 그냥 그것으로 족합니다. 도니, 과거니, 현존이니, 나와 남의 분리니 하는 이런 개념들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깨달음은 습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심해보고, 관심이 깊어지면, 지금 이순간밖에 없다면 '나'라는 것이 어디 있을 것이며, 그런 반복된 의심과 호기심이 결국 뚫어 냅니다. 그런의문들이 가슴속에 가득차게 됩니다. 저는 빈둥대고 귀찮고 게을렀는데, 제게 그 호기심 하나가 왔고, 자나깨나 그것 하나만 생각하다보니 그 낯선 것이 익숙한 것이되고, 단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하나가 점점 진실을 보여주고, 나와 물건들의 구분,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와 밖의 소리,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차이가 사라지는, 처음에는 그것이 놀라운 것이었다가 지금은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 진실, 대단치 않은 이것이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설핏 드러난 이 진실을 당신은 이제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갔는데, 나중에는 그 진실이 나를 이끌고 갑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끌고 가기에 이젠 그리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꿈이고 허구라는 것을 잠깐 보았을 뿐인데, 이게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그 빛을 더욱 크게 합니다.


●토토님의 공지글을 읽을 때마다 참 감동을 받는데, 그 글이 토토님을 증거합니다. 삶이 힘든데, 회사가 힘들고 그 상황이 버거운데, 그런 중에서도 점심을 맛있게 먹고, 때로는 박장대소하고, 버거운 삶에 밤에 집에 들어가 지쳐 쓰러지는데, 이게 행복인가하는 말이 튀어나오는, 토토님은 이전에 늘 힘겨워했는데, 문득 아, 행복해하는 말이 나오는, 주변의 여건은 전혀 행복할 수 없는데 이 말이 나오는, 진실은 나타난 현상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상과 동일시되어 일희일비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한번 만나게 되면 동일시가 떨어져 나가고 현상의 힘듬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분리를 경험한 순간이 자기를 만나는 순간이고, 그런 분리가 오더라도 이후로 또다시 동일시됩니다. 이게 또오나, 언제까지하는 투덜거림이 있더라도 여전히 함몰되지 않습니다. 이게 자신과의 만남이 그렇게 만든것입니다. 물결쳐 오는 고통은 큰듯하나 결코 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회사가 최근에 세무조사를 세번이나 받고, 불안정하고, 집안, 회사가 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그래서 예전처럼 기대고 의지할 사람을 찾게되는데, 그 사람들이 다 저를 내치더라고요. 그러면서 문제가 생긴 것은 내 안인데, 왜 밖에서 위로받으려들었지 하는, 다른 사람에게 해결책이 없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 해결책을 찾으려 했지하는 생각, 그런 생각에 뻥쪘고, 그러면서 여전히 힘든 상태에 있는데, 그렇더라도 지금 힘든 상태가 괜찮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토토님에게 행복하다는 말을 처음으로 듣고, 또 이 힘든 상황이 축복이라는 말을 듣게되는, 사랑받지 못해 늘 남에게 의지하고 인정받으려 들었는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늘 조마조마해하는, 내침을 받으면 그것처럼 힘든게 없었는데, 오늘 그 내침이 축복이라는 말을 듣게되는, 왜 '내가 남에게 해답을 얻으려했지'하는 앎이 자신에게 진짜로 왔다고 말했는데, 그게 진짜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지금 멍하게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답을 다른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는하는 표현을 들으면서, 제가 참 많이 감동을 받습니다. 우울하고 멍한데, 그것이 나쁘지 않다는 표현에서 바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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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부터 저도 바쁘고 토토님도 바빴네요, 지금 보이는 사진의 뒷모습에서, 그리고 선생님 강의중에 침잠한듯한 토토님의 모습, 무엇인가 위로를 해주고 싶었어요. 시간이 한참 지나고나서, 맥주나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할껄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진정으로 위로받을 마음이 사라진 사람, 위로받는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미 스스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가는 사람이기에 잘하겠지만, 그래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힘내~~'하고 싶네요.




●예전에 당신의 전화를 받으면서 제 가슴이 무너져 내렸었는데, 당신에게 질적인 변화의 순간이 있었고, 그 순간을 제가 기억하는데, 저주스럽고 한탄스럽던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던 시각이 달라지는 그 변화, 똑같은 것의 뒷면을 보게되는, 비로소 현실로부터 배워나가게 되는, 그리고 그렇게 배워나가는 과정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이 뜨거운 여름, 작은 꽃씨가 땅에 떨어져 자라고 커나가기아 참 힘든 여정일텐데, 사람의 여정에서 내면의 열림은 두번째 탄생이라 말할 수 있고, 그 여정이 마치 하나의 씨앗이 떨어져 자라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힘든 것이 오더라도 회피하지 않는, 그것이 참 힘든데, 그 힘들게 물결쳐 오는 것에 더 이상 함몰되지 않는, 지금 모습을 보면 더 예뻐지고, 살이 오르고,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을 보면 그 말과는 상관없이 그 말을 뚫고 나오는 어떤 생명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제가 힘들면 책을 보는데, 그게 제가 제게온 힘듦을 피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일을 하다가 수치심이 느껴지면 더이상 피할 곳이 없으니까 그냥 수치심을 느끼는, 자판을 두들기다가 수치심이 올라오면 자판이 더이상 나가지 않고 그냥 그 수치심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안에 화석처럼 굳은, 얼음처럼 얼어있는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목격합니다. 그 아이가 왜 생겼는지가 이해되는, 그래서 거부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을 어려워하는게 다 이해가 되는, 그런 자신의 결핍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놀라운 전환, 수치심을 경험하면 대뜸 자신을 비난하는데, 자신을 만나게 되면서, 그냥 수치심을 경험하게 되는,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저는 단지 뒷면도 있다는 말을 계속하고, 그러다 상대방이 탁 열리는 순간이 오게되면 그때부터 저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그분의 이야기만을 듣게됩니다. 그 성장의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감사하고, 크게 흔들리더라도 그만큼 성장하는 것을 보게되면 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명현반응이 있습니다. 증상은 더 심해졌지만 사실 그것은 뿌리에서부터 치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러면서 '내가 사라진다'는 느낌이 들고, 또 그렇다면 그렇게 느끼는 '나'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시는데, 내가 사는것이 아니고 그냥 살아진다는 새로운 이해에서 '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나'라고 생각했던 그 나가 개입해서 이렇게 이해하는 '나'는 뭐지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내가 계획하고 책임졌는데, 이게 뒤바뀌면서 삶이 그냥 펼쳐지는데, 그것을 '나(에고)'가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그냥 그 삶을 살게되면 나중에 이해가 저절로 옵니다. 이해하거나 아는 것이 없는데 삶에 대해 모르는게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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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기만 해도 힘든데, 야마꼬님이 비빔밥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리는 앎의 대상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있다면 내 삶이 다 바뀌게 됩니다. 내가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니 도니 이런 것을 모르더라도 삶이 바뀌면 이게 진짜입니다. 홀로서서 가고 있다면, 도, 깨달음이런 것들은 다 필요없습니다. 나라는 경계가 사라지고 나와 밖의 경계가 없는, 삶이 괴롭다가 갑자기 고통이 사라져 버리고 완전한 평화가 오는, 이 변화를 저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사실 이건 이해의 차원이 아닙니다.


●어둠이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것이고, 고민이 있다는 것은 해결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답을 밖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답은 문제 안에 있습니다. 문제를 외면하거나 밖에서 찾으면 그 문제안에 있는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를 내것으로 받아들이면 내 삶의 영역안으로 받아들이면, 외면하고 한탄하는 것으로는 절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수박은 그 속이 빨간색인데, 그것이 빨간색일 수 있는 것은 빨간색 아닌 다른 색이 있기 때문입니다. 빨간색만 있다면 이게 더이상 빨간색이 아니고 더불어 '색'도 아니게 됩니다. 이와같이 문제안에 들어가면 문제가 전혀 없거나, 문제가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해결책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은 과거의 기억으로 지금 있는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어떻게 멈출 수 있겠냐고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이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은, 인생은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현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무료하고 지겨움'이 올라오면 가치있는 것으로 채우기위해 책을 읽는 등의 의미있는 행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당신은 현존을 말하면서 현존을 버리고 있습니다. '무료하고 답답할 때' 이게 현존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가치있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료하고 답답한(현존)'을 버려버립니다. 진정한 생명은 지금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올라온 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찾아갑니다. 이전에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행위를 하는 것을 정지하고, 그래서 무료해보고 지겨워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이성이 발달해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아무것도 하지 말아보아야 알게됩니다. 진짜 중지해야, 알려는 모든 노력을 중지해야 알게됩니다. 이 시간을 이렇게 헛되이 보내야하냐며 가치있는 것으로 채우려는 행위를 이젠 진짜로 멈추어 보십시오. 그래서 '무료함, 심심함'을 진짜로 존중해 보십시오. 지금 올라오는 '무료함과 심심함'이 생명입니다.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현존'입니다.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는데, 당신이 당신 자신을 내치지 않고 그 무료함과 심심함과 하나가되면, 그 안에는 더이상 무료함과 심심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내 안의 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게 되면, 당신이 하는 질문, 그 사람도 있는 그대로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의 생명을 만남으로 인해 밖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게 됩니다.


●저는 냉혈안인 가슴, 진짜를 느끼지 못하는 그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 제대로 절망도 못하는 가슴, 그러나 이런것과 깨달음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여러분은 모두 깨달아 있습니다. 어쨌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어떠한게 중요한게 아니라, 그 가장 밑바탕에 있는 진실이 중요합니다. 비록 반나절밖에 실행을 못하고, 티비를 켜고, 그러면서 나는 이정도밖에 안되나하는 생각이드는데, 그 모양보다는, 그 밑바탕에 진짜를 원하는 마음이 중요하고, 당신에겐 그 진짜 목마름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습니다. 이 길을 계속가다보면 어느날 알게되는 순간이 옵니다.


●가능성은 항상 지금,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가능성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노력했으니 저렇게되었다하는 인과법이 아닙니다. 그냥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현재에 주목하면 기억이 점점 옅어집니다. 현재에 섬세하게 더 깨어있게 되면, 움직임,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경험하면, 세수할 때 대부분 딴 생각을 하는데, 세수할 때 의식을 거기에 두면 떨어지는 물방울의 차가움, 그 질감, 몸의 움직임, 감각, 그런 짧은 순간순간들에 깨어있으면 그때 과거는 없습니다. 내가 잡고 있는 샤워기, 벽, 움직임이 구분이 안되는 그 현존의 장, 길을 걸을 때 그 움직임, 발바닥의 질감, 그 순간의 움직임에 집중해 보는, 그것에 조금만 맛을 보면 그것이 넓어지고, 재미를 붙이고, 그러면서 자신이 감각하지 못했던 감각들에 깨어나게 됩니다. 그러니 과거의 기억을 일부러 끊을 필요가 없고, 단지 지금 현존하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나'도 사라지고, 단지 작용, 움직임만이 느껴집니다.


●이 육체는 실체가 아닙니다. 이것은 있다고 할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순간 나타난 감각적인 것을, 촉감을 통해 이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 감각기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외부의 세계는 이 감각기관을 통해 파악되고, 그 파악된 것이 세계입니다. 육체를 움직이는게 있습니다. 이게 있음으로 감각기관이 작용하고, 감기기관은 이것에 의존합니다. 귀가 듣는게 아닙니다. 눈이 보는게 아닙니다. 이것의 바탕이 있습니다. 오직 실체는 이것밖에 없고, 이게 감각기관을 활동하게 하고 그 감각기관의 활동을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고정관념이 깨지면, 보는게 눈이 아니고, 듣는게 귀가 아니게 됩니다.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스스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조작하지 않고 그냥 두고보게 되면, 신발을 신을때 불쾌한 감각이 일어나고, 그러면 내가 불쾌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지켜보면 내가 불쾌한게 아니라 단지 불쾌함이 올라옵니다. 내것이 아닌 그냥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감각, 그 작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을 그 자체로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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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잘생긴 분은 누군가요^^~~~



 덥네요~,

모두들 힘내시고,

9월에 뵈요,

여전히 덥겠지만,

그래도 열대야는 없어지겠죠~~





 


댓글목록

박가현님의 댓글

박가현 아이피 (115.♡.93.66) 작성일

가족 사진이 너무 좋네요.
모두 예쁘게 웃는 얼굴이 보는 사람도 덩달아 웃게 합니다. ^^
....................................................

예전엔 떨려서 말도 잘 못하고 말이 빨라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던 토토가
어느 날부터
또박또박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천천히 전달하더니, 이제는 누구의 도움도 청하지 않고
한발 한발 자신의 힘으로 뚜벅 뚜벅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늘 가슴이 벅차고 감사합니다.
저렇게도 변하는 구나 . . .저렇게 커 가는 구나 . .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 . .

이번 달에는 얼마나 힘든지 말을 걸어도 대꾸를 잘 못할 정도라고 했는데 . . .그것마저 축복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토토
그 힘겨움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모습을 모임 내내 보면서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토토!
부디 지금 와 있는 그 힘겨움을 온전히 맞이하기를
섣부른 위로나 위안은 구하지도 말고 받아들이지도 말기를 . . .

사랑으로,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그 하나로 . . .
온 존재로 . . . .지금 토토와 함께 합니다.
모든 해답이 삶에 있음을,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감사인지 몸소 보여주는 토토에게 온
지금의 그 힘겨움을 감사와 사랑으로 함께합니다. ()()()

ps. 이 더운날 불앞에서 나물볶고 계란 지단까지 붙이며 비빔밥 만들어 주신 아마꼬님, 설거지 도맡아 하시는 박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라임님의 댓글

라임 아이피 (58.♡.117.162) 작성일

정말 가족사진 너무 좋네요~^^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맥주는 더더더 감사ㅎ

산청모임 참 따뜻합니다♡
아이들 좀 더 크면 박가현 선생님 부부처럼
우리들도 동반참석입니다.^^

담달에 뵐께요~^^

여름가지님의 댓글의 댓글

여름가지 아이피 (183.♡.203.138) 작성일

라임님~,
그래요,
남편분과 동반참석할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이 지금도 생각나는데,
때때로 사줘야된다는 의무(?)감이 생기네요 ㅠ

평안한 나날들 되시길.........

오응준님의 댓글

오응준 아이피 (49.♡.54.69) 작성일

사진들이 넘 이쁘내요.
마지막 김샘 흑백사진도 넘 좋고요.
좋은 글과 사진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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