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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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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계 댓글 9건 조회 8,989회 작성일 13-01-2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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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광주에 사는 50대 초반의 주부입니다.
어제 우연히 선생님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라는 책을 접하고 단숨에 읽었습니다.
느낀 바가 참 많았고, 도덕경의 새로운 해석을 접한 것도 신선했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마음속에 생긴 의문이 있어서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서 내가 가진 많은 상처나 부족한 점 그로인한 자괴감, 피해의식 들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진 느낌입니다.
그런데, 제가 드는 의문은 그 사람이 가진 본질 적인 문제점, 즉, 예를 들면, 화, 분노, 성욕, 식욕, 수면욕..같은 것들은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런 문제점들과 계속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면, 진정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되면, 그런 문제점들도 저절로 수그러들거나 해결이 되는 겁니까..
어떤 상처나 집착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일차적인 힐링은 될 수 있을 것 같으나.
결국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면, 자신의 단점도 극복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
 
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작성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드는 의문은 그 사람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점, 즉, 예를 들면, 화, 분노, 성욕, 식욕, 수면욕..같은 것들은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런 문제점들과 계속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라구요.

  그러나 화, 분노, 식욕, 성욕, 수면욕..같은 것들은
  결코 '문제점들'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을 이루는 소중한 생명이요 생명력들이며, 나아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문제점들'이라는 인식 자체가 아직은 이원성(二元性)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진정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하나가 되면 이 진실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정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되면, 그런 문제점들도 저절로 수그러들거나 해결이 되는 겁니까.."라고 님은 물으셨지만,
  오히려 '문제점들'이라는 생각 자체가 사라지면서 자유가 오게 됩니다.

  또 님은
  "결국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면, 자신의 단점도 극복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라고 말씀하셨지만
  '단점'이라는 생각도, 무게도 사라지면서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도 진정으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금 있는 그대로
  본래 부처랍니다.

경계님의 댓글

경계 작성일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수준의 단점들, 예를 들면 사기성, 교만, 이중성, 성충동, 게으름..같은 것들도 그대로 인정해야합니까..

김기태님의 댓글의 댓글

김기태 작성일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수준의 단점들을 말씀하지 마시고,
'님 자신'의 단점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도(道)는 구하거나 찾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하거나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열리지 않는답니다.
자신의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진리와 자유가 열리는 것입니다.

공간님의 댓글의 댓글

공간 작성일

김기태 선생님의 사전에는 '정면대결'이라는 단어가 없는 모양이네요.
첫 질문에는 애매모호 화법으로 도피하시더니, 이제는 '자신의 문제만 물어라'로 도피하십니까?
자신의 문제가 아니면 아예 묻지도 못하는군요?
경계님은 순수한 의도로,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신 것 같은데요. 
그럼 1499번 심원님 질문에는 왜 답을 주셨나요?
그 역시 ‘남의 얘기’ 아닌가요?
선생님은 '일관성'이라는 게 없으십니다.
왜 그때 그때 다르지요?
1500번 글처럼 “마음 편하고 싶다”는 분께는 “마음 편하지 않은 '지금'을 받아들여라. 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라고 답하시면서,
왜 1482번 무명님께는 “게으른 ‘지금’을 받아들여라. 성실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라고 답하지 않으십니까?
왜 “당장 일어나서 나가라. 나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라."고 말씀하십니까?
비겁하십니다.
선생님의 원래 가르침대로 하자면 그 게으름속에 온전히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나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야 하는 게 아니라, 게으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게을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다가 삶이 진짜로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가다 죽든, 게으르다 죽든,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나가다 죽을 일은 없으니까 짐짓 그렇게 말씀해보신 건가요?
계속 게으르라고 하면 진짜로 죽을 것 같으니까 겁이 나서 “당장 일어나서 나가라”고 하신 건가요?
죽음이 두렵습니까?
김수희의 애모도 아니고, 왜 죽음 앞에만 서면 작아지십니까?
그래가지고 무슨 법을 설하시겠다는 겁니까?
마음의 문제에 답을 할 때는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다가, 물리적 현실로 연결되는 문제에 답을 할 때는 겁을 내고 작아지시면 안 되지요.
초라할 때 초라하고 무기력할 때 무기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나태할 때 나태하고 분노할 때 분노하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싸울 때 싸우고 죽일 때 죽이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김선생님의 가르침에 ‘일관성’이라는 게 생깁니다.
희랍인 조르바 아시죠?
그야말로 온갖 죄를 저지르며 ‘있는 그대로’ 살았던 사람이죠.
살인도 했어요.
하지만 살인을 함으로써 ‘살인이 나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살인이 나쁘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계속 살인해야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이 번 생에 안 되면 다음 생까지.
다음 생에도 안 되면 다다음 생까지.
불수인혹. 살불살조.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등명 법등명 하는 것.
이게 바로 ‘지금 여기’의 세계입니다.
겁나는 세계지요.
‘아, 자유!’ ‘아, 평화!’ 이러면서 얄팍한 감성에 호소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없으면 그냥 판을 접으세요.
공자도 나이 70에 ‘종심소욕불유구’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있는 그대로 살아도 아무런 걸림이 없는 경지죠.
세계 3대 성인 중의 하나인 공자가 나이 70에 도달한 그 경지를, 그냥 한 생각 돌이켜서 단숨에 도달하시려구요?
차라리 로또를 사세요.
김기태 선생님의 ‘지금 여기’는 교활합니다.
심리치료 수준의 ‘지금 여기’를, 생사해탈의 ‘지금 여기’와 억지로 연결시키려 하니 교활해 질 수밖에요. 
부처님 최후의 법문인 ‘본래성불’은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부처님이 그 간단한 법문을 놔두고 일평생 팔만 사천 법문을 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것.. 이런 게 바로 교활함이지요. 
부처님이 중생들 골탕먹일 일 있습니까?
그냥 처음부터 쉽게 가르쳐주면 될 걸..
기독교는 또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 두꺼운 성경을 통해 그렇게 알쏭달쏭한 말들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으셨겠습니까?
그냥 김선생님처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걸..
하나님 아이큐가 김선생님 아이큐보다 낮은가요?
1654년 11월 23일 밤, 파스칼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때의 감동을 무작정 글로 적어 평생을 자신의 옷 속에 품고 다녔지요.
다음은 그 글의 전문입니다.
======================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
……
밤 열시 반에서 열두 시 반경까지.
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식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확신, 확신, 감격, 환희,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 모든 사물에 대한 망각
하나님은 복음에 표시된 길에 의해서만 발견된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운 아버지시여, 세상은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하여도
저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환희, 환희, 환희, 환희의 눈물.
……
나는 절대로 그 분에게서 떠나지 않겠다.
그는 복음에 표시된 길에 의해서만 보존된다.
일체를 결연히 포기할 것,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지도자에 대한 완전한 복종.
지상의 시련 끝에 만나게 될 영원의 환희,
나는 당신의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
어떻습니까?
이 글이 ‘찌질한 자신의 못남’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보이십니까?
파스칼은 요즘 말로 ‘엄친아’였습니다.
돈 많고 학벌 좋은 최고의 지성, 최고의 엘리트였던 그가 무슨 열등감에 그리 시달렸겠습니까?
깨달음을 ‘찌질하고 못난 자신을 정죄하며 갈등하는 행위의 종결’로만 국한시키지 마세요.
그렇게만 따진다면 이 세상의 심리치료사들은 모두 영적 스승이게요? 
사채업자나 조폭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내면의 갈등’이라는 게 있나요?
누가 보던 말던 그냥 ‘배째라’하면서 자기 갈 길 가는, 그야말로 최상승 도인들 아닙니까?
생사를 초월하는 ‘지금 여기’를 가르치시려면 그야말로 ‘쎄게’ 나가시든지..
그럴 자신이 없으면 깨달음은 언급하지 마시고 그냥 심리치료로써의 ‘지금 여기’만 가르치시든지..
뭔가 양자택일을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어정쩡한 애매모호 화법으로 사람들 헷갈리게 하실 겁니까?
산책 중에 누가 칼로 찌를까봐 두려웠다는 말씀을 하시질 않나.. 깨닫고나면 생사를 초월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질 않나.. 이건 뭐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그런 건 심리치료로써의 ‘지금 여기’ 수준도 못됩니다.
김기태 선생님.
님은 비록 교활하긴 해도 심성이 여리고 착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같은 어중이 떠중이가 오며가며 이런 글을 남겨도 삭제를 안 하시지요.
그리고 님 자신에게도 공포와 탐욕이 있고 때로는 음흉한 생각도 한다는 등의 말을 강의 중에 서슴없이 하시지요. 
예, 탐진치가 있어도 지복을 느낄 수 있다는 거, 인정합니다.
때때로 탐진치 상태에 있다가, 또 때때로 지복을 느끼기도 하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문제는 비율입니다.
'점수'라는 게 바로 그 비율을 계속 '지복'쪽으로 맞춰나가는 과정이지요.
‘지금 여기’라고 다 같은 ‘지금 여기’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그 머무름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 다른 것입니다.
설익은 사람도 있고 푹 익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익어가는 과정이 바로 '점수'입니다.
이걸 님 자신이 정확히 인식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애매모호 화법에서 벗어나실 수 있습니다.
님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셔야 합니다.
"나는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 덜 익었다. 계속 익어가야 한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무른 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계속 익혀 나가야 한다.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야 사람들이 안 헷갈립니다.
"탐진치 이대로 부처인데 익히긴 뭘 익혀?" 이렇게 말씀하시면 사람들 조낸 헷갈립니다.
그러다가 또 깨달음 후의 자유, 평화, 사랑까지 언급하시면 사람들 머리에 쥐납니다.
이왕 사람들 가르치려고 법석을 펼치셨으면 좀 제대로 가르치셔야죠.
님이 제대로 가르치시면 제가 미쳤다고 이런 글 처쓰고 앉아있겠습니까?
오히려 님 밑에 들어가서 법을 배우지..
헤겔은 근대철학의 거목입니다.
변증법의 정반합을 우습게 보지마세요.
‘I am that’으로 가려면 ‘I am not that'을 거쳐야 합니다.
웜홀은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습니다.

공간님의 댓글

공간 작성일

ㅎㅎ 그 부분이 김선생님의 아킬레스건입니다.
최대한 피해가고 싶은, 아주 민감한 부분이지요.
그래서 경계님 질문의 요지를 뻔히 아시면서도 짐짓 동문서답을 하시는 거지요.
< 화, 분노, 식욕, 성욕, 수면욕..같은 것들은 결코 '문제점들'이 아닙니다. >
무슨 초딩들 대상으로 법문하시는 것도 아니고..
정상인들의 적당한 욕구는 문제점이 아니라는 걸 누가 모른답디까?   
그 얘기 듣자고 질문 올렸겠습니까?
김선생님의 평소 지론에 의하면 강간범이나 살인범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욕망을 거부할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김선생님은 이런 민감한 부분에서는 말을 살짝 돌리십니다.
그들이 자신의 분노와 욕망을 '정말로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결코 죄짓지 않게 된다.. 라구요.
죄는 커녕 영원한 자유와 평화가 찾아 온다구요.
과연 그럴까요?
김선생님은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예의 그 탐진치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탐진치 그대로 부처라고 합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지요.
결국 김선생님의 말씀을 종합 해보면, 중생의 탐진치 속에서 무한한 지복을 느낀다는 얘긴데..
참.. 머리에 쥐나는 말씀이시지요. 
김선생님은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김선생님은 해결의 의지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모순이라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계신 듯 합니다.
그 부분을 외면하고 싶은 '무의식'의 작용이 아닐까 합니다.
본래성불.. 좋지요.
그야말로 최상승 법문이지요.
"탐진치 그대로 부처다" 이 말 듣는 순간 언하대오 하면 모든 탐진치가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탐진치 그대로 부처니까 고민하지 말자~ 에헤라디여~ 이러면서 계속 탐진치속에 있으면 깨달은 게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게 단박에 돈오돈수 하는 최상근기는 참으로 드물지요.
그래서 다들 꼬리내리고 돈오점수의 길을 가는데..
우리의 김선생님은.. 참.. 
빌어먹던 거지가 자기 주머니에 백억짜리 수표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바로 거지 생활 끝내지요.
계속 거지 생활을 한다는 건 결국 수표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지요.
탐진치 속에서 지복을 느끼다니..
해탈이 무슨 애들 장난입니까?
그냥 해탈이 아니고 생.사.해.탈.입니다.

신경질님의 댓글

신경질 작성일

왜 해탈하고 싶으신겁니까?
공간님은 무엇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그런데 잘 압니다. 그럴수 있다는것을요...
저도 그랬습니다.
공간님~! 힘드시겠지만
마음 공부 이제 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자유와 평화. 찾지 마십시오.
왠 명령어? 앗!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공간님의 댓글

공간 작성일

마음공부 안 합니다.
그냥 삽니다.
아인슈타인이 해탈하려고 물리학을 공부한 건 아니죠.

신경질님의 댓글의 댓글

신경질 작성일

네~.
답변 고맙습니다~.

우심님의 댓글

우심 작성일

'광주'라 하시니 참 반갑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지요.
직접 뵙고 강의를 들으시면
차원이 다른 감동이 올지도 모릅니다.
저희 부부는 산청모임에 참석합니다.
광주에서 2시간 거리입니다.
제 차로 함께 저희 부부와 함께 가시면 되니까
꼭 연락 한번 주십시오.
양완모 010-2601-8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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